[문화비평]대중문화와 역사재현의 명암

이기형 |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2016. 9. 27.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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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역사의 흐름과 주요 사건들 그리고 그 속에서 고뇌하고 대응하는 인간 주체의 행태를 담아내는 대중적인 텍스트들의 생산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의 영역에서도 일련의 역사적인 주제와 인물을 녹여내는 작품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에만 해도 광해, 관상, 역린, 군도, 명량, 국제시장, 사도, 암살,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 밀정, 그리고 고산자-대동여지도 등의 대중적인 관심을 크게 모은 작업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문화산업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적인 소재들은 대중이 이미 인지하는 인물군이나 사건을 ‘탄력적’으로 재현하면서, 보다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의 힘과 가능성을 상업적인 성공과 연계시킬 수 있는 주요한 자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집합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한 작업들은, 식민과 고난, 친일과 저항 등의 측면을 조밀한 미장센과 영상미 그리고 선이 굵은 서사와 연기를 기반으로 흥행에도 크게 성공한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역사물의 재현과정에서 종종 제기되는 쟁점은 특정 인물과 사건을 둘러싼 서사화 속의 ‘왜곡’과 구성된 역사적 팩트와 상상력 사이의 괴리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까지도 적지 않은 역사영화나 드라마들이 역사적으로 구현된 사실성의 측면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풀어내거나 스펙터클한 볼거리에 치중하고 과도한 허구성을 설정함으로써 비판과 논란을 견인하기도 했다. 동시에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팩트와 픽션의 조합물로서 이른바 팩션의 현실 속 영향력이 지대해진 바도 있다.

혹자는 대중문화물이 추구하는 재미와 상품성을 강조하면서, 역사텍스트에 관한 지나치게 엄격하고 까다로운 비판과 주문이 과하다는 입장을 펼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역사와 기억이라는 소재를 갈무리하면서 과거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대안적인 서술과 문화적 상상력의 발휘가 생성하는 새로운 관점과 해석의 개방성이 발산하는 의의에 주목하기도 한다.

나아가 쟁점과 이견을 불러일으키는 대중문화물을 매개로 한 역사재현이 뜨거운 논쟁과 숙의 그리고 확장된 담론작용을 사회 내에 유발하는 일종의 공론장적인 기능을 높게 평가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문화현상에 관심이 큰 연구자로 최근에 주목을 받은 텍스트들 속에서 시대와 문화 트렌드의 징후를 ‘읽게’ 되는 측면에 관해 잠시 논하고자 한다.

<덕혜옹주>는 실존했던 특정 인물을 다루면서 항일을 화두로 수용자들의 관심을 끌어냈지만, 역사재현의 과도한 상업적 수단화와 왜곡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최후의 황녀’로 그녀가 일본에 끌려와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라고 되뇌면서 조선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말라고 조선어로 당부하는 대목은 서사의 흐름 속에 일정한 감정적인 울림을 불러오지만, 사실성과는 거리가 먼 재현의 방식이다.

이 영화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친일의 문제와 강하게 대비되는 민족감정과 저항을 덕혜라는 매력적이지만 가상에 가까운 고안물 속에 녹여놓으면서, 연민과 감동과 같은 감정적인 측면을 ‘안전하게’ 고무한다. 동시에 극단적인 설정과 허구적 상상력의 발휘가 선을 넘으면서, 이 작품은 ‘역사적 진정성’의 문제를 곱씹게 해주기보다는, 역사재현 속 가상성의 한계와 분열증을 노출하면서, 종국에는 상업성과 판타지로 치환된 역사의 소비라는 문제점을 소환하기도 한다.

현실을 돌아보자. 비가역적이라는 생소하고 단언적인 표현을 쓰면서 당사자들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를 망각해버린 한·일 합의나, 국정교과서라는 구태의연한 발상을 숱한 비판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현 정부의 행태,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독재자를 건국의 아버지로 추대하겠다는 흐름 등이 한층 강화되는 우리 사회 내 일그러진 초상은, 역사와 기억 그리고 망각과 저항의 문제가 단순한 소비나 이견의 대상일 수만은 없으며, 여전히 살아있는 쟁점이자 치열하게 숙고해야 할 사안임을 곱씹게 해준다.

대중문화가 역사라는 복잡한 단층을 대상으로 수용자들에게 창의적인 스토리텔링과 앎 그리고 재미를 견인하는 대표적인 매개체라 하더라도, 역사의 이면과 상처를 자성하면서 진중하게 보듬는 작업과, 이를 능동적으로 탐구하는 비판적 해석의 힘이 필히 요구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이기형 |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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