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은둔자' 집 굴뚝..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김정봉 입력 2016. 8. 3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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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 옛집굴뚝⑪] 청송·영덕·영양 마을(6) 영양 연당마을 옛집굴뚝

[오마이뉴스 글:김정봉, 편집:박혜경]

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 연당마을 굴뚝 연당마을은 동래정씨 정영방이 숨어 살기 좋다하여 정착한 후, 후손들이 집성마을을 이뤘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 굴뚝은 낮거나 숨어있다. 사진 속 굴뚝도 연기구멍이 굴뚝 몸체에 배꼽만큼 돋아있는 ‘배꼽굴뚝’이다.
ⓒ 김정봉
영양은 예전에 고은(古隱)이었다. 유래야 어찌되든, 이름만 봐도 풍광이 수려하고 숨어 살기에 좋은 고을이다. 외지기로는 어느 고을에 뒤지지 않는다. '육지 속 섬'이라 한다나? 기묘사화, 왜란과 호란, 양란으로 사회가 어수선할 때 명문가들이 숨어 살기 좋다하여 몰려들었다.

400년 전, 영양 일월면 주실마을에 한양조씨, 영양읍 감천마을에는 낙안오씨, 석보면 두들마을에 재령이씨 집안이 터 잡고 집성마을을 이뤘다. 영양은 '문인의 고을'로 불린다. 문향(文鄕)이 되기까지 이 마을들은 두둑한 배경이 되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은 주실마을에서, 항일시인 오일도는 감천마을에서 났고 작가 이문열은 두들마을에서 자랐다.  

영양의 인물로 일생을 혁명적으로 살다간 두 여성을 빼놓는다면 서럽다 할 것이다. 석보에서 태어난 남자현(1872-1933)은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매진, '독립군의 어머니'라 불렸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전지현역)의 실제 모델로 알려지기도 했다. 장계향은 석계 이시명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조선 유일의 여성군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두들마을에 살면서 최초로 한글로 된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썼다.

한양조씨, 낙안오씨, 재령이씨 외에 사회혼란기에 영양을 숨어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기고 정착한 또 한 인물이 있었다. 동래정씨 석문(石門) 정영방(1577-1650). 용궁현(현 예천)에서 태어났으나 1613년, 입암면 연당마을에 들어와 서석지(瑞石池) 정원을 꾸미고 은둔하였다.

조선 3대 민간정원으로 꼽히는 서석지

▲ 서석지 정경  못 가운데 90여개 기이한 돌이 있어 서석지로 불렸다.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과 더불어 조선 3대 민간정원의 하나로 꼽힌다.
ⓒ 김정봉
▲ 자금병과 남이포 일월산이 반변천과 청기천, 두 물을 가르며 내달리다 갑자기 멈춰 만들어진 바위 벼랑이 자금병이다. 자금병 앞, 반변천과 청기천 두 물이 만나는 합수머리가 남이포(南怡浦)다.
ⓒ 김정봉
서석지를 코앞에 두고 자금병(紫錦屛) 앞에 섰다. 일월산이 반변천(半邊川)과 청기천(靑杞川)을 가르며 내달리다 급정거하여 굳어버린 바위 벼랑이다. 자금병의 골기에 놀라 가던 길 멈추고 나도 급정거했던 것. 1873년 이곳에 들른 겸재 정선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붓통을 열고 진경산수, <쌍계입암(雙溪立岩)>을 남겼다.

반변천 서쪽, 자금병을 마주보고 솟은 봉우리가 부용봉(芙蓉峯)이고 자금병과 부용봉 사이를 석문(石門)이라 부른다. 석문은 자금병과 부용봉을 기둥삼아 서석지로 들어가는 거대한 자연문인 셈이다. 부용봉에서 갈라져 길가에 우뚝한 바위가 선바위, 입암이다. 입암을 가운데 두고 양쪽 자금병과 부용봉의 골기를 화폭에 담은 그림이 겸재의 <쌍계입암>이다. 

정영방은 서석지를 집안정원, 내원으로 하고 부용봉과 자금병, 석문, 반변천을 포함한 산수는 바깥정원 외원으로 삼았다. 세상에서 이처럼 큰 정원 또 있을까마는 그 스케일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 서석지 은행나무와 대문 서석지 대문은 정면에서 북서로 돌아앉아있다. 대문 옆 모퉁이에서 4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오는 이를 반긴다.
ⓒ 김정봉
▲ 서석지 담과 경정 지붕 서석지를 담으로 가두고 집주인은 그 안에 자신의 철학이 담긴 유가의 세계를 만들려 했다.
ⓒ 김정봉
연당마을 어귀에서 은행나무가 반긴다. 벌써 400년 이상 해오던 일이다. 1640년, 영양 두들마을에 정착한 석계 이시명, 기묘사화이후 낙향한 한양조씨 후손, 호은 조전과 사월 조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영양에서 7년간 귀양살이한 약봉 서성, 청하현감을 지낸 겸재 정선까지 서석지에 다녀간 수많은 묵객들을 '나이테 레코드판'에 꼼꼼하게 기억해 두고 있다. 서너 번 다녀간 내 자취도 한구석 어디쯤 있을 거야. 

은둔자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인가, 서석지 대문은 북서로 돌아앉았다. 정면은 대문이 아니라 담이다. 담은 서석지를 네모 안에 가두고 바깥세상과 엄격히 구분하였다. 담으로 공간을 한정하고 그 안에 유가의 세계를 담으려 한 것이다.

서석지 중심 집은 경정(敬亭), 퇴계학의 계승자임을 바깥세상에 알리고 있다. 방 두 칸, 마루 한 칸짜리, 단아한 맞배지붕 집, 주일재(主一齋)는 정신을 한곳에 모아 바르게 하는 집이다. 주일재 앞에 사우단(四友壇)을 꾸미고 대나무, 소나무, 국화, 매화를 심어 벗으로 삼았다. 외로움을 견디고 마음이 흐트러질 때 잡아주는 '반려식물'이다.

▲ 주일재와 사우단  주일재는 정신을 한곳에 모아 바르게 하는 집이다. 그 앞에 사우단을 만들고 네 가지 나무를 심어 벗으로 삼았다.
ⓒ 김정봉
경정 앞마당에는 못을 파고 잡석으로 단을 쌓아 연못을 만들었다. 못 가운데에 상서로운 돌, 서석(瑞石)이 가득하다. 모두 제자리에 있던 돌들이다. 물 위로 드러난 돌이 60여 개, 물속에 잠긴 돌이 30여 개, 물 높낮이 따라 드러났다 잠겼다 한다.

정영방은 못을 파다 발견한 기이한 돌을 보는 순간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그는 서석에 이름을 붙여 죽은 돌을 살려냈다. 철학과 영감이 만나는 순간이다. 겸재가 <쌍계입암>에서 예술가 영감으로 선바위, 입암에 골 기운을 보탰다면 정영방은 철학자 영감으로 서석에 이름을 붙여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신선이 노니는 돌 선유석, 상서로운 구름 돌 상운석, 물고기 닮은 돌 어상석, 떨어진 별 돌 낙성석, 바둑 두는 돌 기평석, 문드러진 도끼자루 돌 난가암, 물을 갈라지게 하는 돌 분수석, 누워있는 용 돌 와룡암, 나비가 노는 돌 희접암, 꽃과 꽃술을 감상하는 돌 화예석, 갓끈 씻는 돌 탁영반까지 안빈낙도의 생활철학, 선비정신, 신선세계를 표현해 놓았다.

서석지는 단순히 아름다운 정원이 아니라 자연, 생명, 은둔자의 철학이 듬뿍 담긴 미의 세계다.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과 더불어 조선 3대 민간정원으로 꼽힌 이유다.

▲ 연당마을 흙돌담과 고택 그리 높지 않은 흙돌담이 동래정씨 후손 집들을 잇는다.
ⓒ 김정봉
▲ 태화당고택 고방채 흙담 흙과 막돌로 무심히 쌓은 흙벽으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순해지고 눈이 편해진다.
ⓒ 김정봉
경정 들문(門)으로 연당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서석지는 이상세계요, 마을은 현실세계다. 야트막한 흙돌담은 마을 구석구석 뻗어 동래정씨 후손 집들을 이었다. 비운 지 오래된 몇몇 집들은 일상(日常)을 잃었지만 '자가용 유모차'를 앞세우고 마을회관에 가는 할머니들은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흙돌담 끄트머리에 태화당고택이 있다. 1800년대 말, 석문의 후손 정익세(1842-1923)가 지은 집이다. 고방채 흙담에 마음이 닿았다. 흙과 막돌로 마음가는대로 쌓은 흙담, 무명도공이 빚은 막사발 같다. 무작위에서 오는 자연미, 정녕 한국의 미가 이런 게 아닐는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연당마을 굴뚝들

▲ 연당마을 굴뚝 집을 비운지 오래되어 개망초가 집을 점령해버렸지만 오롯이 남은 낮은 굴뚝에서 옛 주인의 생각이 읽힌다.
ⓒ 김정봉
▲ 주일재 굴뚝  아궁이는 보이는데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숨었을까? 주일재 뒤쪽 토방 아래에 숨었다.
ⓒ 김정봉
동래정씨 후손 집 아니랄까봐, 굴뚝은 거의 숨다시피 하였다. 사람 손을 타지 않아 개망초에 반쯤 가린 굴뚝이나 굴뚝 몸에 배꼽만한 연기구멍만 돋은 굴뚝, 정지 앞 토방 굴뚝까지 대부분 낮은 굴뚝이다.

서석지 굴뚝은 아예 숨어버렸다. 주일재 굴뚝은 주일재 뒤 토방(흙마루) 속에 숨었고 경정 굴뚝은 보이지 않는다. 주일재 굴뚝은 동남쪽 방에 딸린 아궁이를 확인하고도 굴뚝은 한참 만에 찾았다. 그나마 토방 위가 살짝 깨져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경정굴뚝이다. 경정 마루 밑에 있는 함실아궁이를 보고도 굴뚝은 끝내 찾지 못하였다.

▲ 경정 아궁이  경정은 방이 두 개로 아궁이는 마루 밑에 동서로 나란히 있다. 여기에 어떻게 불을 지폈을까 의심하여 굴뚝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궁이가 맞는 것으로 확인하였다.
ⓒ 김정봉
▲ 경정 굴뚝 경정 뒤편 토방 밑에 숨었다. 이처럼 찾기 어려운 굴뚝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정한 은둔자’ 집 굴뚝이다.(김태경 영양군 문화해설사 사진)
ⓒ 김태경
공사할 때 아궁이만 만들고 굴뚝을 없애버린 것 아닌가하는 의심도 해보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 확신하고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영양군청이 소개한 김태경 문화해설사와 연락이 닿았다. 굴뚝을 찾다가 도저히 찾지 못했다는 하소연과 함께 사정 얘기를 하니, 고맙게도 직접 서석지에 가서 마을 어른의 도움으로 굴뚝을 확인한 뒤 사진을 보내주었다.

주일재와 같이 경정 뒤 토방에 묻혀있었던 것. 주일재 굴뚝은 위가 깨져 찾을 수 있었지만 경정 굴뚝은 납작 엎드리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곳에 숨어있었다. 석문선생은 진정한 은둔자 맞긴 한 게로군,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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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6/27~29에 청송, 영덕, 영덕(영해)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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