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공부에 지쳐버린 조선 선비의 '야한 시?'

심진용 기자 2016. 8. 28.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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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안대회 교수, 조선 선비 이현급의 ‘작가초여승’ 발굴

조선 후기 선비 이현급의 과시집 <여력>에 실린 ‘작가초여승(作歌招女僧)’. 안대회 교수 제공

‘위편삼절’이라는 말이 있다. 말년의 공자가 <주역>에 심취해 죽간의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탐독했다는 뜻이다. ‘과골삼천’이란 말도 있다. 귀양 간 다산 정약용이 자리에 앉아 책 쓰는 데 워낙 골몰하다보니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는 얘기다. 비록 공자나 다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은 과거 준비에 그야말로 ‘피땀’을 쏟았다. 과거 공부에 지친 선비들이 어떻게 머리를 식혔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옛 시가 발굴됐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가 최근 계간 ‘문헌과 해석’ 연구자 모임에서 흥미로운 시 한 편을 소개했다. 조선 영조 때의 양반 이현급(1711~?)이 지은 시 ‘작가초여승(作歌招女僧)’, 즉 ‘노래를 지어 비구니를 꾀다’이다. 시는 제목처럼 비구니를 보고 첫눈에 반한 과객이 상사병이 날 정도로 사랑에 빠졌음을 절절히 고백하고, 애절하게 구애하는 내용이다.

“사람 목숨 살려내야 그게 바로 부처이니(活人之命方爲佛)/ 대장부인 나의 병이 깊은 것을 살펴보오(看我男兒病深處)/(…)/ 낭자의 마음은 돌부처라 머리를 끄덕이지 않고(娘心石佛不點頭)/ 과객의 심중은 봄누에라 속내를 드러내지 않네(客意春蠶未吐緖)/(…)/ 첩첩산중에 있다면 산문을 닫아걸지 마시오(千山萬疊莫閉門)/ 백년 인생 동안 화려한 내 집에서 살게 하리니(百年吾家華屋貯)….”

이 시는 이현급이 남긴 과시집(科詩集) <여력(餘力)>에 실려 있다. 과시집은 과거에 대비해 ‘기출문제’나 ‘예상문제’를 염두에 두고 쓴 ‘과시’를 모은 책을 말한다. 요즘으로 치면 ‘수능 대비 노트’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현급은 왜 이 작품을 과거시험 대비용으로 썼을까. 과거시험은 보통 유학 경전에서 나오므로 ‘작가초여승’ 같은 주제가 채택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안 교수는 “성현들의 고담준론만 공부하다 보니 지쳐 좀 자유롭고 재미있는 글을 써보려 했던 것 같다”고 했다. 나름 머리 식힐 방법이었다는 설명이다. 안 교수는 “과거에 전혀 생각하지 못한 주제가 나올 경우를 대비한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현급이 ‘작가초여승’을 쓴 시기는 1730~1745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는 1745년 과거에서 을과 1위, 곧 전체 2등으로 급제했다.

안 교수는 “새로 발굴한 ‘작가초여승’은 조선후기 애정가사 ‘승가(僧歌)’의 대중성과 작품성을 밝혀주는 작품으로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승가’는 이현급 앞세대 인물인 남휘(1671~1732)와 한 비구니 사이에 오간 4편의 연작가사로, 열렬한 구애와 승낙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안 교수는 “ ‘승가’는 조선시대 ‘신데렐라 스토리’인 셈인데, 17세기 말부터 인기가 대단했다”며 “ ‘작가초여승’을 보면 ‘승가’가 상층에게까지 널리 퍼졌고 인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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