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해주면 계약".. 1인기업 수난사

이은하 입력 2016. 8. 28. 15:23 수정 2016. 8. 2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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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모 - 나는 자영업자다] 오늘도 헛발질 될 망정 사람들 앞에 선다

[오마이뉴스 글:이은하, 편집:김지현]

<오마이뉴스>와 전국가맹점주협의회연석회의, 전국을살리기국민운동본부,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그리고 참여연대가 '나는 자영업자다' 공모를 띄웠습니다. 자영업자의 절절한 속사정, 자영업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주세요. <편집자말>

 1인기업을 시작했다.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 pixabay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만지고 옷매무새를 살펴본다. "아, 에, 이, 오, 우"를 반복하며 입술 근육을 풀어준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적혀 있는 일정표를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오전 9시 30분, 하루가 시작됐다.

지난 4월부터 넉 달을 '1인 기업가'로 살았다. 부모님 자서전을 대필해서 책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다담'(多談)이 내 일터다. 사무실은 없다. 인터뷰와 집필만 하는 일의 특성상 서재가 사무실인 셈이다. 책 편집과 인쇄는 전문업체에 맡겼다. 

창업을 하면서 두 가지 현실에 놀랐다. 하나는 빛의 속도로 사업자 등록증을 발급해주는 우리나라의 행정력이다. 또 하나는 정부의 창업자금이 헛된 곳에 쓰이며 줄줄 세고 있다는 것이다.

사업자 등록을 하려고 보니 절차가 정말 간단했다. 게다가 일 처리 속도도 빨랐다. 우리나라 공무원의 민원 처리 속도가 언제부터 이렇게 빨랐나 신기할 정도였다. 국세청 누리집에 접속해 주민등록번호, 창업하려는 사업 업종, 사무실 주소 등 몇 가지 정보만 입력하면 반나절 이내에 사업자 등록이 완료됐다는 문자 메시지가 날아온다(정보 입력이 잘못돼 있을 경우엔 담당 공무원이 전화까지 해준다). 다시 국세청 누리집에 접속해 사업자등록증을 출력하면 모든 절차는 끝난다.

실업률을 줄이기 위한 대안으로 정부가 창업을 독려하면서 개인사업자 등록이 쉬워졌다. 전산화가 잘 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요즘은 사무실로 쓸 건물 등기부등본 등 담당 공무원이 사업장 인가를 위해 확인해야 할 서류의 전산 확인이 가능하다. 검토하는 데 10여 분도 걸리지 않는다.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 컴퓨터로 신청서를 살펴보고 클릭 한 번 할 때마다 사업자가 한 명씩 더 생긴다. 그 순간 정부의 실직자 수는 줄고, 취업률은 높아지겠지. 마우스를 클릭하면 취업률이 높아지는 현실, 그 뒤에는 감춰진 그늘이 있다.

 사업자등록은 국세청 누리집에서 손쉽게 할 수 있었다.
ⓒ 국세청 누리집 갈무리
성희롱 상담자가 성희롱 당하는 기막힌 현실

계약 건수 '0건'. 지난 4개월간 다담(多談)의 운영 실적이다. 열심히 사람들을 만났지만 계약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내가 만든 자서전 샘플을 보여주며 환갑이나 칠순 선물로 부모님께 좋다고 이야기해도 그들은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는다. 오백만 원짜리 해외여행은 갈 만정 그 절반 가격이면 만들 수 있는 자서전 제작은 "호사"라면서 고개를 가로 젓는다.

가장 진상 고객은 데이트를 해주면 계약을 하겠다는 사람이다. 솔직히 내가 그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다. 성희롱을 당한 날, 내가 한 공무원 관련 기관 여성상담센터 실장이었을 때 상담했던 수많은 여성 공무원들이 떠올라 집에 와서 울었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내가 성희롱을 당했다고 기가 막힌다고 남편에게 말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왜 그런 자리에 나갔니?" "위험하다고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그랬잖아." "욕심 부리지 말라고 그랬지?" 피해자에게 던지는 질책의 시선. 나도 그것이 두려워 그들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달았던 계급장(안정된 직장과 높은 직책)을 떼고 나서야 명확하게 들어왔던 현실. 나는 온전히 그들 편에 서지 못했었다. 그 당시엔 같이 울어주고 함께 싸워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미안해서 울었고, 내가 당한 일이 치욕스러워서 또 울었다.

"정부의 창업지원 자금, 못 타먹으면 '바보'"... 뭐라고?

 창업자원자금 정책을 홍보하고 있는 정부
ⓒ 중소기업청
창업하면서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창업 컨설팅 하는 것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중 범법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창업을 하겠다고 하니 지인 중 한 사람이 소개해줄 사람이 있으니 만나보란다. 그러면서 한 마디 툭 던진다.

"창업 컨설팅 해주는 사람인데, 허황된 말도 있으니 알아서 걸러 들으세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1시간 후에 알게 되었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을 듣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소개해 준 지인한테 '저런 사람하고 어울리다니 이해할 수가 없네' 실망감이 들 정도였다.

그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창업 자금은 안 갚아도 그만인 돈"이라고 말했다. "서류만 그럴싸하게 만들어서 자본금을 지원받은 뒤, 실제로 사업 한 것처럼 영수증만 처리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연관업체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아주 좋다"며 "자기가 그런 것을 다 주선하고 계획서 등 각종 서류를 만들어줄 테니 지원금의 얼마를 달라"고 했다.

"저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는데요. 위법이잖아요."

불쾌해서 소리치듯이 말한 내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다들 그러는데요. 못 타 먹는 사람만 바보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

더 들을 것도 없다싶어 문을 박 차고 나왔다. 지인이 말한 '허황된 말'이 정부 돈을 타기 위해 위법을 저지르라는 말이었나 싶어 화가 났다.

경력단절여성 연구한 연구자가 경력단절여성으로... 그래도 다시 찾은 꿈

 지금은 결실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 그 열매를 딸 수 있지 않을까.
ⓒ pixabay
"왜 창업을 했어요? 뭐가 아쉬워서요?"

성과도 없는 일을 지난 4개월간 붙들고 있는 내게 몇몇 지인은 물었다. 먹고 살 길이 없는 것도 아닌데 사서 고생한다는 시선을 던지면서 말이다. 대답부터 한다면 경력단절 여성을 연구했던 연구자가 경력단절 여성이 된 기막힌 현실을 탈출하고 싶었던 몸부림이었다.

사업은 될 것 같으면서도 잘 안 됐다. 넉 달간 어떻게 하면 사업이 잘 될까를 고민하며 그 어느 때보다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리고 질문으로 가득찬 삶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창업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 가장 크게 바뀐 점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다. 한마디로 겸손해졌다. 관심 있는 일만 하려던 태도도 변화됐다. 다양한 관심사를 지닌 여러 계층의 사람을 만나다 보니 사람에 대한 이해력도 높아졌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열매다. 

지난 넉 달을 돌이켜 보면 늘 모든 일에 조급했던 것 같다. 빨리 실적을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 탓에 밤을 하얗게 지샜던 날도 많았다. 이젠 보다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으니 값진 결실이 맺어질 날이 오지 않을까?

아침 9시 30분. 오늘도 집을 나선다. 귓가가 간지럽다.

"엄마, 언제 자서전 나와?"

큰 아이의 목소리가 맴돈다. 나지막히 말해 본다.

"응, 이제 나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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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는 자영업자다' 공모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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