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더 이상 겁나지 않아..현실이 더 오싹하니까

노정연 기자 2016. 8. 25.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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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일상이 공포인 시대, 나를 두렵게 하는 것들

당신이 가장 크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자료: PMI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여름이면 어김없이 극장가에 등장하던 공포영화가 눈에 띄게 줄었다. 흉가 체험 등 혹서기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아이템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일상이 공포고 현실이 영화보다 잔인한데 납량특집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2016년 여름, 우리 이웃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공포는 무엇이었을까. 올 상반기 인터넷에 언급된 공포 연관어를 들여다보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웠던 공포가 무엇이었는지 물어봤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 2016년 대한민국의 풍속도는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얼마 전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증권사 과장 황민복씨(41)는 아이가 태어난 후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와 불안이 더욱 커졌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직장에서의 퇴출. 조직과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면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잠 못 이룬다. 그는 “어느 시대에나 가장들이 느끼는 부담이 있지만 고용불안이 심화된 요즘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은 공포 그 자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의 한 원룸에 거주 중인 교사 이민지씨(가명·32)는 자취생활 5년 만에 방범창을 설치했다. 남의 일로만 여겨왔던 흉악범죄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조심한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범죄의 표적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하다”고 털어놨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건 상상이나 환상 속의 공포가 아니라 현실에서 마주하는 공포였다. 온라인 및 모바일 조사회사 PMI가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www.tillionpanel.com)’을 통해 10~50대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람들이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은 범죄 및 사고(21%)로 나타났다. 실직이나 취직 등 불확실한 미래(19.2%)가 그 뒤를 이었다. 그다음은 정부(13.6%), 돈(12.4%), 사람(8.2%), 질병과 죽음(6.9%) 순이었다. 귀신은 공포의 대상에서 저만치 밀려났다. ‘귀신 등 초자연적인 존재’라 답한 응답자는 1.8%에 불과했다.

여성은 범죄 및 사고(25.5%)에, 남성은 불확실한 미래(20.7%)에 가장 큰 공포감을 느꼈다. 강남역 공용화장실 살인 사건과 섬마을 교사 성폭행 사건 등 최근 잇따른 강력범죄의 피해자들이 여성이었음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는 50대 남성(26.6%)에게서 가장 컸고, 그다음이 10대 남성(25%), 20대 여성(23.5%), 40대 남성(20.4%) 순이었다.

청소년기의 성적 걱정, 20대의 취업 걱정, 50대의 은퇴 후 삶에 대한 고민 등 으레 그 나이대의 통과의례로 여겨졌던 걱정들이 생존과 직결되는 공포로 증폭되고, 전 세대가 비슷한 공포를 느끼는 경향을 보였다. 실제로 ‘돈’과 ‘질병 및 죽음’에 대한 공포는 10대부터 50대까지의 편차가 거의 없었다.

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원장은 “과거보다 기술적으로 안전한 사회가 됐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는 더욱 크고 현실화됐다”고 말했다. ‘정부’에 느끼는 공포가 ‘돈’이나 ‘죽음’보다 큰 것은 “생존의 위협과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표출된 것”으로 풀이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각종 범죄와 경기침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말은 인터넷 빅데이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소셜분석 플랫폼 티버즈(TIBUZZ)가 올 1월부터 7월까지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블로그에서 ‘공포’ ‘두려움’ ‘무서움’과 함께 언급된 단어를 수집한 결과 전체 202만6793건 중 ‘사람’이 30만1674건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인간’도 6만6567번이나 언급됐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 4월에는 ‘미세먼지’(1894건)가, 강남역 공용화장실 살인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5월에는 ‘화장실’(3063건)이 공포 연관어로 자주 등장했다.

최근에 생긴 두려움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75명이 “있다”고 답했다. ‘묻지마 범죄’ ‘교통사고’라는 응답이 많았다. 이는 불특정 다수가 희생된 일련의 사건·사고들을 겪으면서 그동안 막연하게 타자화했던 공포가 ‘나 또는 내 가족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직접적인 공포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국민안전처가 발표한 ‘국민안전 체감도 분석 결과’를 보면 올 상반기 국민들이 느끼는 안전 체감도는 5점 만점에 2.79점에 불과했다. 이 밖에 ‘대출이자’ ‘돈 없이 아기 키우기’와 같은 경제적 불안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한 ‘더위’와 ‘누진세’ 역시 올여름 국민들을 떨게 한 공포의 키워드였다.

▶페이스북 독자들의 말 말 말

>>‘경향신문’ 페이스북을 통해 독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공포스럽게 하나요?’

20대 고시생

흘러가는 시간. 고시생에겐 시험 2번 보면 2년이, 3번 보면 3년이 훌쩍 지나가 있다. 이렇게 계속 시간만 흐르고 난 여전히 멈춰 있으면 어떡하나 그게 가장 두렵다.

30대 싱글여성

백세시대. 노후 준비는커녕 전셋값 오른 것도 감당이 안되어서 또 이사가는 이 마당에 백세시대는 축복이 아닌 저주인 것 같다.

40대 직장인

회사가 망하거나 기타 이유로 이직을 해야 하는 상황. 우리나라에서 40대가 이직할 수 있는 곳도 거의 없고 아마 백수가 될 텐데, 그러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먹고사나.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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