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앞세운 북 '고조선평양설'은 또 다른 '국뽕'

입력 2016. 8. 25. 20:06 수정 2016. 8. 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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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고난의 행군’ 시기 애국심 고취 목적
“고고학 자료 모두 고조선과 억지연관”
한국고고학회 ‘북한 학계 동향’ 발표문

북한은 1993년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라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 예전부터 있던 고구려식 석실분을 발굴해 단군과 그 부인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 뒤 이 무덤에서 200m 위쪽에 높이 22m, 한 변 50m 크기의 거대한 규모로 단군릉을 개축하고, ‘고조선평양설’의 근거로 삼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조선과 낙랑의 위치를 둘러싸고 남한 학계가 안팎으로 소란스런 지금, 북한 쪽 논의는 어떨까?

그런 궁금함을 해소해주는 논문이 최근 한국고고학회 학술회의에서 공개됐다. ‘통일고고학을 위한 연구현황과 과제 진단’을 주제로 23일 서울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북한학계 고조선 및 낙랑 고고학의 최근 연구동향’이란 발표문을 통해 북한 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현주소를 잘 정리해 보여주었다.

북한 학계는 ‘고조선평양설’을 확고한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북한의 리주현·한은숙이 엮은 <조선고고학총서 1 총론>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북한 고고학계는 대동강 유역 일대에서 발굴된 노예순장 무덤, 고대 성곽들, 대규모 부락 유적, 1만4천여기의 고인돌과 돌관무덤 등을 근거로 “대동강 류역이 바로 고조선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동강 류역에서 기원하여 고대 문명을 빛내인 고대 문화를 ‘대동강문화’로 명명, 1998년 10월2일 ‘대동강문화’의 학술발표회를 실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요컨대 고조선의 중심은 처음부터 평양이었고, 나중에 후기 고조선을 거쳐 기존의 낙랑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90년대 이전,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 북한 학계의 정설은 고조선평양설이 아니라 그 반대인 ‘고조선요동설’이었다. 해방 이후 도유호(1905~1982) 등 일군의 학자들은 고조선의 도읍지와 한군현 낙랑이 순차적으로 평양에 실재했었다는 ‘왕검성·낙랑군 평양설’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 학계는 오랜 논쟁 끝에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고고학적 발굴·연구 성과라서 모두 날조된 것이라며 이 학설을 폐기했다. 또 70년대 이후엔 평양 지역에서 발견된 한대 병행기 유적과 출토 유물이 중국 중원 지역의 유물과는 다르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고조선요동설의 방증으로 삼았다.

그러다 단군릉을 발굴하라는 김일성 주석의 교시(93년 1월8일)를 시발점으로 고조선요동설은 단번에 폐기된다. “단군릉을 기원전 3000년기로 인정하며, 이와 동시에 거의 모든 고고 자료들을 초기 고조선과 관련시켜 설명하기 시작한다.” 정 교수는 그 배경을 절체절명의 체제 위기였던 ‘고난의 행군’에서 찾았다. 북한 정권의 정통성 강조와 애국 의식 고취를 위한 ‘북한판 국뽕’은 단군릉 발굴을 기점으로 ‘고조선평양설’ 재정립에 이어 ‘대동강문화론’(1998년)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98년은 북한 정권수립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북한 학자 류병흥이 1995년 발표한 논고 ‘단군 및 고조선 시기의 유적유물 발굴 성과에 대하여’는 북한 고고학계가 걸어갈 길을 앞장서 제시했다. 그는 “단군릉이 평양 주위에 위치한다는 점”이야말로 고조선평양설의 고고학적 증거라고 언명했다. 이어 고인돌, 토성, 회색토기, 비파형 동검과 동모 등도 모두 고조선의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가령 강동군 순창리 석관묘에서 발굴된 금동귀걸이가 기원전 25~23세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언’만 있을 뿐 ‘증거’는 없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서창성’, ‘마고성’, ‘룡산리성’ 등 새로 발견된 토성 조사보고가 이어졌는데, 그 ‘의도’는 2013년 최승택이 그간 조사된 서북조선 일대 토성 자료를 집대성한 논고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고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성곽이 반드시 출현하며, 그것이 (고대 국가의) 정치·경제의 중심이고 나아가 지역 거점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시설이다”라고 언급한 대목에서다. 고조선평양설을 뒷받침할 근거로 토성을 동원했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발견돼 낙랑·대방군과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토성도 그 상한을 모조리 청동기 시대까지 올려, 고조선의 것으로 ‘정리’했다. 그뿐 아니라 성철 같은 학자는 ‘화분형 토기’를 고조선 고유의 것으로 설명(2005년)하고 있으나, 이 역시 일방적인 선언에 가깝다고 정 교수는 지적했다.

그럼에도 북한 학계에선 “(과거) ‘고조선·한4군 요동설’이 일반론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보여준 격렬한 토론과 연구자간 논쟁”이 사라졌고, 단지 “고조선평양설을 입증할 나름의 근거 발굴에만 몰두할 뿐”이라고 한다.

정 교수는 발표문 말미에서 “낙랑군평양설을 부정하는 북한 학계의 주장을 여과 없이 신용하여 국내 학계의 고조선평양설을 공격하거나, 낙랑군평양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을 식민사학자로 매도하는 일부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며 이른바 ‘유사역사학자’들 일부를 겨냥하기도 했다.

이어 토론에 나선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고조선평양설을 채택하고서도 낙랑군평양설은 부정할 수밖에 없는 북한 학계의 현실을 딜레마로 설명했다. 고조선평양설을 채택하면 낙랑군의 위치 또한 평양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럴 경우 민족성지인 평양이 한 제국이라는 외세의 지배를 받은 것이 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평양 일대에 고조선의 후국 또는 낙랑국이 있었다는 식의 주장을 북한 학계가 펴고 있다는 것이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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