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 전 오늘.. 민주화 꿈꾼 정치인, '사법살인' 당하다

이슈팀 이건희 기자 2016. 7. 31.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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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간첩 누명 쓰고 사형대에 올라야 했던 죽산 조봉암 선생

[머니투데이 이슈팀 이건희 기자] [[역사 속 오늘]간첩 누명 쓰고 사형대에 올라야 했던 죽산 조봉암 선생]

1956년 자신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죽산 조봉암 선생의 모습. /사진=위키미디어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이 같은 유언을 남긴 죽산(竹山) 조봉암 선생은 57년 전 오늘(1959년 7월31일)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를 구제하기 위한 변호인단의 재심 신청이 대법원에 의해 기각된 지 18시간 만이었다.

조봉암의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죄와 간첩죄였다. 1959년 2월20일 대법원은 조봉암이 대남 간첩 양명산(본명 양이섭)을 통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명목으로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선고의 주요 근거는 양명산이 2심에서 허위라고 번복했던 자백이었다.

61세의 나이로 사형대에 오르기 전까지 조봉암은 대한민국 정치계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해방 후에 중도 통합노선을 걸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까지 맡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이후 조봉암은 제2대, 제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며 대권에 도전했다. 특히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은 이승만이 얻은 500만 표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216만 표를 얻었다. 이전 대선에서 얻은 79만여 표에 비하면 약 3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선거 당시 국민의 지지를 확인한 조봉암은 1956년 11월 평화통일론을 주창하며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진보당을 창당했다. 반공주의로 장기집권을 꿈꾸던 이승만 정권의 입장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결국 1958년 1월13일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 터졌다. 경찰은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북한과 야합한다"는 명목으로 체포했다. 이승만 정권은 같은 해 2월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했다.

재판에 넘겨진 조봉암에게는 또 하나의 악재가 있었다. '대남 간첩 양명산' 검거 소식이었다. 양명산은 특무부대의 조사 과정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대남공작금을 진보당에 정치자금으로 제공하며 조봉암과도 밀회했다고 밝혔다. 그의 진술로 조봉암의 죄목에 간첩 혐의가 추가됐다.

1958년 7월2일 열린 1심 재판에서 검찰은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그의 간첩 및 간첩방조죄 증거들이 대부분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가보안법 위반만 유죄로 인정돼 재판부는 조봉암에게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이에 자칭 반공 청년 약 200명은 판결에 불복하며 법원에 난입하는 등 소란을 벌이기도 했다.

1958년 10월25일 열린 진보당 사건 2심 선고 공판 모습. 이날 재판부는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진=위키미디어

2심에서는 간첩죄의 중요한 근거가 된 양명산의 증언이 번복됐다. 양명산은 "특무부대가 시키는 대로 말했다"며 과거의 진술을 번복했지만 오히려 재판부는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의 최종 결정도 마찬가지였다.

변호인단의 재심 신청, 언론과 정치권의 구명 운동이 있었지만 조봉암은 57년 전 오늘(1959년 7월31일) 사형대에 올라야 했다. 그는 체포된 뒤 약 1년6개월 만에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사법 살인'을 당했다.

현재 조봉암은 간첩 누명에서 벗어난 상태다. 무죄를 선고받기까지 52년이 걸렸다. 2011년 1월20일 대법원은 그의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결정은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해 '당시 야당 정치인을 제거하려는 표적수사가 사형집행으로 이어진 정치탄압'이라고 규정하고 유족들이 이를 근거로 2008년 8월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한 지 2년이 넘은 뒤에 이뤄진 것이었다.

이슈팀 이건희 기자 kunhlee90@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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