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한국 게임 성장판 닫혔나

신한슬 기자 입력 2016. 7. 2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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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고구려 국내성에서 시작된다. 직업부터 선택한다. 전사·도적·주술사 중에서 고른다. 머리 모양만 조금씩 다를 뿐, 모두 초록색 옷을 입은 캐릭터이다. 일단 맨손으로 동굴에서 다람쥐나 토끼를 사냥해 ‘레벨’을 올린다. 전리품인 도토리나 토끼 고기를 정육점에 팔고 돈을 모아 무기를 사면 나중에는 호랑이도 잡을 수 있다. 채팅창에 뭔가 적어 올리면 캐릭터 위로 말풍선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거래·협력이 가능하다.

한국 최초의 그래픽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가 2016년 스무 살 성년이 되었다. 플레이어들도 게임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현재 <바람의 나라>를 하는 플레이어 가운데 10%는 50대이다. 게임 경력이 10년 이상인 캐릭터만 34만4366개다(한 명이 여러 캐릭터를 플레이할 수 있다). <바람의 나라>와 함께 한국 온라인 게임도 ‘20대 청년’이 됐다. <바람의 나라>는 한국 온라인 게임의 시조이자 살아 있는 역사인 셈이다.

<바람의 나라>는 특정 역할을 수행하는 캐릭터를 키우는 역할 수행 온라인 게임(MMOR PG)이다. 고구려가 배경이고, 김진 작가의 순정만화 <바람의 나라>가 원작이다. 1996년 4월4일, 처음 출시됐을 때는 동시접속자가 9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9년 뒤인 2005년에 최고 동시접속자 수 13만명을 기록하며 ‘국민 게임’이 됐다. 2011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상업적 그래픽 MMORPG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넥슨 제공 : 7월1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바람의 나라> 2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바람의 나라>는 국내에서 정식 출시된 게임 중 최초로 ‘그림’이 들어간 상업 온라인 게임이다. 지금 인터넷 환경에서야 의아하겠지만 <바람의 나라> 이전의 온라인 게임은 오로지 텍스트로만 구성되었다. 문자부호로 공룡을 그려낸 <쥬라기 공원>(삼정데이타시스템)과 산과 기와집을 표현한 <단군의 땅>(마리텔레콤)은 유료였는데도 인기를 누렸다. 하이텔·나우누리 등 전화와 연결된 통신서비스(PC통신)가 인터넷을 대신하던 시절이다. 네트워크는 느렸고, 통신비는 비쌌다. 가정용 컴퓨터 성능도 좋지 않았다. 온라인 게임에 그래픽이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한 일이었다. <바람의 나라>는 여기에 ‘귓속말 채팅’(서버 전체가 아닌 특정 플레이어들만 공유하는 채팅), 욕설을 금지어로 바꾸는 시스템, 캐릭터끼리 결혼할 수 있는 시스템 등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플레이어 간 소통 체계를 처음으로 도입해 인기를 끌었다. 정액제 유료화도 최초로 시작했다. 캐릭터가 ‘레벨 5’에 이를 때까지만 무료로 플레이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1990년대 말, 정부가 정보통신 산업에 역점을 두면서 온라인 게임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96년 당시 한국통신이 초고속통신망을 시범 도입했고, 2년 뒤인 1998년부터는 다른 통신사업자들도 참여했다. 일반 가정에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보급되면서 온라인 게임 성장을 위한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전국에 PC방이 빠르게 증가한 것도 이 시기다. 외환위기 속에서도 PC방은 고소득 창업 아이템으로 인기였다.

2000년대 초고속통신망 타고 빠르게 성장

이를 바탕으로 1998년 출시된 <리니지>(엔씨소프트)는 한국형 MMORPG의 기준을 세웠다(<게임 사전>, 이인화·한혜원). 신일숙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현실적인 그래픽과 플레이어의 자율성을 폭넓게 용인하는 시스템을 선보였다. 세계 최초로 대규모 전투 시스템인 ‘공성전’을 도입하기도 했다. ‘혈맹’으로 팀을 나눈 플레이어들이 공격·수비로 나뉘어 게임 내 성을 차지하는 시스템이다. <리니지>는 출시한 지 2개월 만에 동시접속자 수 1000명을 돌파해 2년 뒤 10만명, 3년 뒤 30만명으로 늘어났다.

<리니지>의 성공을 따라 대형 온라인 게임이 잇따라 출시됐다. 국내 최초 3D MMORPG <뮤>(2001년·웹젠), 2D와 3D를 결합한 <라그나로크>(그라비티), 화면이 좌우로만 움직이는 2차원 가로 스크롤 MMORPG <메이플 스토리>(2003년·넥슨), <마비노기>(2004년·넥슨) 등이 대표적이다.

해외 진출도 본격화됐다. 타이완에 진출한 <리니지>는 국가 전산망을 마비시켰다. <미르의 전설 2>(위메이드)는 국내에서는 <리니지>에 밀렸지만, 대신 중국 게임 시장을 평정했다. 출시 후 10년간 동시접속자 수 80만명, 누적 회원 수 2억명, 전 세계 누적 매출 2조2000억원을 돌파했다. <메이플 스토리>는 타이완·미국·싱가포르·일본·홍콩 등 60여 개국으로 수출됐다. 국내 게임 전체 수출액은 2001년 1억3047만 달러에서 2011년 23억7807만8000달러로 18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한국 게임의 역사> 공저자 박수영 게임 디자이너는 '2000년대 초반이 국내 온라인 게임 산업의 외적 성장 시기라면, 2000년대 중반은 장르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내적 성장을 이룬 시기다'라고 분석했다. 대표적으로 탱크의 발사각과 힘을 조절해 서로를 공격하는 슈팅 게임 <포트리스 2>(CCR), 상대를 물풍선에 가두는 액션 게임 <크레이지 아케이드>(넥슨), 레이싱 게임 <카트라이더>(넥슨) 등 캐주얼 게임이 대히트했다. <스페셜 포스>(드래곤플라이), <서든어택>(넥슨지티)과 같은 1인칭 슈팅 게임(FPS)도 등장했다. 휴대전화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버튼 한 개를 연속으로 눌러 조작하는 <미니 게임 천국>(컴투스)이 국내 모바일 게임 사상 최초로 누적 다운로드 수 1000만을 달성하기도 했다.

<단군의 땅>(위)처럼 문자부호로 게임 화면을 구성하던 게임과는 달리 <바람의 나라>(왼쪽)는 국내 게임 중 최초로 ‘그림’이 들어갔다.

온라인 게임 산업 규모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게임에 대한 논쟁과 규제도 시작됐다. 청소년들이 심야에 24시간 PC방을 이용하는 것이 사회문제로 지적돼, 1999년 ‘청소년 야간이용금지 등에 관한 법률’로 이용 제한이 시작됐다(현재는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로 규제하고 있다). 특히 <리니지>는 선풍적 인기만큼 희귀 아이템을 현금으로 거래하는 관행이 생겨 사기 등의 범죄에 연루되는 일이 빈번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출시 초) 어떤 유저가 회사에 찾아와 아이템을 구입하려다 사기를 당했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 게임의 아이템이 현금으로 거래된다는 걸 처음 알고 놀랐다'라고 말했다. 게임에 과도하게 몰입해 오프라인에서 실제 만나 싸우는 ‘현피’가 일어나기도 했다.

<게임과 문화연구>의 저자 강지웅씨는 '한국 사회에는 게임에 대한 이중적 시각이 있다. 게임이 가지고 있는 산업적 성과와 가능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면, 게임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라고 분석했다. 후자가 제도화된 것이 2011년 11월20일부터 도입된 ‘게임 셧다운제’다. 청소년보호법 제23조에 따라 16세 미만의 청소년에게 오전 0시부터 오전 6시까지 심야 시간에 인터넷 게임 접속을 제한하는 것이다. 1999년 ‘청소년 야간이용 금지 등에 관한 법률’로 장소(PC방)를 규제했다면, 2011년에는 야간에 청소년의 접속 자체를 금지하는 쪽으로 강화했다. 청소년의 수면권과 학습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청소년의 자유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 ‘게임 산업 발전을 저해한다’는 식의 비판을 받았으며 위헌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4년 4월24일, 헌법재판소는 '중독성이 강한 인터넷 게임의 특징을 고려할 때 과도한 권리 제한이라고 보기 어렵다'라며 게임 셧다운제에 합헌 판결을 내렸다.

팬들 실망시킨 <서든어택 2> <바람의 나라>

20대가 된 한국 게임 산업은 9조9706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콘텐츠 산업 전체의 약 10%를 차지한다. 출판, 방송, 광고, 지식정보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시장이다. 덩치는 커졌지만 예전 같은 성장세는 아니다. 2009년부터 4년간 평균 14.9% 성장해오던 게임 산업은 2013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특히 온라인 게임 매출은 전년도 대비 19.6% 하락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15 대한민국 게임백서>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지 않는 한 국내 게임 산업은 과거와 같은 큰 폭의 성장을 다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6월17일 미국 게임회사 블리자드가 출시한 신작 FPS 게임(1인칭 슈팅 게임) <오버워치>는 전국 PC방 점유율 33.19%를 기록하며 흥행하고 있다(7월13일 기준). 이와 맞붙었던 국내 개발 신작 FPS 게임 <서든어택 2>(넥슨지티)는 점유율 1%대로 참패했다. 특히 게임 속 여성 캐릭터를 선정적으로 묘사하는 데만 집중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넥슨지티 김정준 대표는 7월14일 공식 사이트에 '일부 캐릭터가 선정적으로 느껴져 불편하셨던 점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이다. 해당 캐릭터를 빠른 시일 내 게임 내에서 삭제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20주년을 맞은 <바람의 나라>도 서비스 미비로 플레이어들을 실망시켰다. 넥슨은 업데이트를 거치기 전, 예전 게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1999년부터 2006년까지의 모습을 그대로 만나볼 수 있는 ‘<바람의 나라> 클래식 서버’를 오픈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옛 버전 배경만 달랑 추가됐다. ‘클래식 서버’도 ‘클래식 월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플레이어들의 실망과 항의에 넥슨은 '사전 안내하는 과정에서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 포함되어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고 밝혔다.

신한슬 기자 / hs5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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