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시시각각] 미국 전당대회, 그 불길한 상상

전영기 2016. 7. 29.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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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지난 2주간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미국의 전당대회들을 보면서 나는 그 나라 정치의 황혼을 느꼈다. 공화당의 패자는 승복 연설을 하지 않았다. 상대 당 후보를 감옥에 보내자는 구호가 등장했다. 민주당 지도부가 집단으로 불공정을 모의했다는 증거도 나왔다. 러시아가 민주당 경선에 개입한 흔적이 있고 오바마 대통령이 ‘러풍(러시아에 의한 민주당 경선 개입)’을 조사하겠다고 했다. 공화당 후보는 러시아한테 더 개입해달라고 요구해 반역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을 빼고 미국 대선이 이렇게 치졸하고 추악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선거 불복이나 불공정 시비, 북풍 논란 같은 메뉴는 한국에서도 사라져 가는 풍경이다. 미국의 정치가 분열과 극단, 증오의 시대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아메리카니즘’을, 클린턴은 ‘함께 더 강하게’란 뜻의 ‘스트롱거 투게더(Stronger together)’를 슬로건으로 걸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외 정책은 내향적이고 축소지향적이다. 그레이트(Great·위대한)니 스트롱거(더 강한)니 하는 말들은 공허하다. 쇠락하는 거인의 콤플렉스 같다. 클린턴은 그나마 보호무역주의를 강조하는 정도에 그쳤다. 트럼프의 고립·보호주의는 병적일 정도로 파괴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의 질서인 유럽의 나토(NATO), 한·미 동맹, 세계무역기구(WTO),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한·미 FTA 등을 수틀리면 모조리 탈퇴하거나 재협상하겠다는 것이다. 안보든 경제든 미국이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명분이다. 70여 년간 진화해 온 세계 질서를 비용의 손익 구조로만 따지는 극단적인 물신(物神)주의가 트럼프와 그의 나라를 좀스럽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가 그리는 미국은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뒤돌아 꽁무니를 빼는 몸집 큰 타조 같다.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해 세상을 흔들더니 트럼프의 미국은 아예 세계에서 탈퇴하려고 한다.

트럼프는 후보 수락연설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잊힌 남녀들 즉, 노동조합원·석탄광부들·저임금 민중의 대변자가 되겠다”고 외쳤다. 지지자들은 흥분했다. 오랜 세월 민주당 편이었던 노동자 계층을 파고들었다. 상대 진영의 강점을 선제적으로 뺏어 오는 영리한 연설이다. 거대한 양대 세력이 충돌하는 대선에서 경험칙상 상대방의 이슈 선점에 성공하는 쪽이 승리하곤 한다. 거기에 비해 힐러리는 지루하며 상투적인 모범생의 틀에 갇혔다. 추세적으로 트럼프의 비호감도는 낮아지는 반면 힐러리의 비호감도는 상승하고 있다.

대선은 마지막 1%의 부동층 게임이다. 두 사람의 최종 승부는 서부영화의 건맨들처럼 전인격적인 일대일 대결에서 결판날 것이다. 현직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 전직 대통령인 남편에다 지금 미국 정치에서 가장 핫한 버니 샌더스의 진심 어린 우정 출연에도 불구하고 힐러리가 인간적 흡인력이라는 면에서 트럼프에게 밀린다는 감상은 어쩔 수 없다. 인간적인 흡인력엔 악마성(惡魔性)도 포함되는데 미국인이 이 덫에 걸려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뿌리치기 어렵다.

지금 한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문제로 중국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 우리는 넉 달 뒤 그보다 훨씬 더한 미국 공포감에 뒤숭숭할지 모른다.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한국 정부가 미군 주둔 비용을 전액 제공하거나 미국의 탄도미사일방어(BMD) 체계에 편입하지 않으면 주한미군 철수, 동맹 해체 수순을 밟겠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제6조는 한·미 동맹의 종결 방식을 규정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 조약은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고한 1년 후에 중지된다.” 동맹의 해체는 이처럼 일방의 통보로 간단하게 진행될 수 있다. 이런 일을 소설적 상상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과 차기 대선의 유력 주자들은 이 같은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면 어떤 답변을 내놓을 건가.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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