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음미하세요, 게으르게 만끽하세요

최흥수 2016. 7. 2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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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슬로시티의 본 고장 담양 창평의 맛과 멋

“이보시오 물한잔은 공짜라오 목마르면 축이시오

돌아보다 힘이들면 쉬어감도 갠찮하고 놀다간들 어떠리오

그러다 정이들면 차한잔 하는거지”

담양 창평의 달팽이가게 홍보문구는 정감이 뚝뚝 묻어난다. 창평은 신안 증도, 완도 청산, 하동 악양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먼저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다. 현재 한국의 슬로시티는 11곳으로 늘어났다.

슬로시티 창평의 최대 강점은 다양한 슬로푸드. 담양=최흥수기자
주민들이 생산하는 물품을 판매하는 달팽이가게 뒤편으로 한옥으로 지은 면사무소가 보인다.
한옥과 돌담, 실개천이 어우러진 삼지내 마을길.
마당에 장독이 가득한 민박집.

창평에 도착해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면사무소 건물이다. 단층 한옥 건물 현관에는 당당하게 ‘昌平縣廳(창평현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지금은 담양의 일개 면이지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만 해도 독립된 군(郡)이었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바로 앞에 와서도 면사무소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는 점이 유일한 부작용이다.

면사무소와 잇닿아 있는 마을이 슬로시티 창평의 핵심, 삼지내 마을이다. 월봉산에서 유래한 월봉천, 운암천, 유천 등 세 갈래 물이 모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엔 100년 세월이 쌓인 한옥과 3.6km에 이르는 운치 있는 돌담길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5호 ‘고재선 가옥’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휘어진 돌담길과 나란히 실개천이 흘러 발걸음은 절로 느려지고, 마음은 옛 정취에 흠뻑 빠져든다.

인디언식 이름처럼 집집마다 내걸린 문패도 재미있다. ‘아궁이가 예쁜 엿집’, ‘겁나 많은 석류나무집’, ‘야생화 체험학습장’ 등은 그 집의 특징과 용도를 한번에 드러낸다. 돌담아래 흙길은 마을주민들이 수시로 다듬어 말끔하지만 어떤 집 마당엔 들풀이 수북하고, 어떤 집 마당에는 장독이 가득하다. 저마다의 방식대로 ‘느림’을 실천해가는 다양성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창평 슬로시티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양한 슬로푸드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옥민박을 운영하는 ‘매화나무집’ 안주인 문현정씨는 손님들 아침상에 냈던 장아찌가 좋은 반응을 얻자 죽순 매실 돼지감자 등으로 10여 가지 장아찌를 담아 본격적으로 판매에 나섰다. 30여 년간 들풀과 약초 공부에 정성을 쏟던 최금옥씨는 ‘36가지 약초밥상’이라는 식당을 내고 자연음식 건강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독일인 빈도림의 생활공방, 김말례의 천연염색, 임은식의 야생화 효소 등 각자의 관심사와 재능을 활용한 공방과 체험장도 창평 슬로시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달팽이가게에서 판매하는 물품도 슬로푸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쌀엿강정과 약과, 간장 된장 고추장, 전통주를 비롯해 마을주민들의 정성이 듬뿍 담긴 먹거리가 자그만 가게를 옹기종기 장식하고 있다. 쌀엿장인 유영군, 강정(한과)장인 박순애, 유과장인 안복자, 간장장인 기순도 등 이 작은 마을에 대한민국 식품명인이 무려 넷이다. 여기에 농림축산식품부 신지식농업인과 마을에서 자체 선정한 명인까지 합하면 20명이 넘는 장인들이 다양한 슬로푸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창평 장터에는 내장국밥 순대국밥 머리국밥 선지국밥 등을 내는 국밥집이 유명하다. 잡고기 특유의 냄새가 없어 예부터 주민들과 길손들에게 사랑 받던 음식이다.

▦소쇄원과 명옥헌 함께 둘러보기

창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선시대의 원림(園林) 명옥헌과 소쇄원이 자리잡고 있다. 원림의 사전적 의미는 ‘자연에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자신의 생활 공간으로 삼은 것’이다. 시설을 최소화하고 집안으로 자연 풍광을 끌어들인다는 개념이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각적인 효과를 우선시해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과는 대비된다.

소쇄원 광풍각. 건물을 작게 지어 풍광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소쇄원 입구는 시원한 대숲 길.
명옥헌 주위는 배롱나무는 8월이면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명옥헌 뒤편 연못에 비친 배롱나무

조선 중기 양산보(1503~1557)가 별장으로 조성한 소쇄원(瀟灑園)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유명 관광지로만 생각하고 간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대나무 숲이 녹색 그늘을 드리운 입구로 들어서면 길 끝자락에 밝은 기운이 느껴진다. 살짝 가파른 언덕에 좁은 계곡을 건너면 건물이라고는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 2채가 전부다. 크기도 산자락에 폭 안길 만큼 소담스럽다. 3면이 트인 광풍각 마루에 앉으면 물소리 바람소리와 어우러진 풍광에 세상의 모든 시름 내려놓는다.

1755년 제작된 소쇄원 목판 탁본을 보면 양산보가 이곳을 무릉도원처럼 꾸몄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유배된 후 처사(處士)의 길을 택했지만, 소쇄원에는 당대의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제월당 마루 위에는 김인후의 시 ‘소쇄원사십팔영’과 함께, 고경명 송강정철 송순 기대승 등이 그를 기려 지은 만시(晩時)가 나란히 걸려 있다.

소쇄원과 창평 중간쯤인 고산면 후산리에는 소쇄원과는 또 다른 느낌의 명옥헌(鳴玉軒)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중기 문신 오희도의 아들 오이정이 꾸민 원림이다. 명옥헌은 마을 뒤편 야트막한 산자락에 안겨 아늑함으로는 소쇄원보다 한 수 위다. 건물 앞뒤로 네모난 연못을 조성한 게 특이하다. 옥구슬같이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는 이름처럼 위의 연못에서 바위를 훑고 아래 연못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자못 청량하다. 건물과 연못 주변엔 온통 배롱나무를 심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담양의 다른 곳보다 개화가 조금 늦지만 8월이면 일대를 분홍빛으로 물들여 장관을 연출한다.

담양=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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