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4번 강정호 - 그 어떤 보도자료보다 묵직했던 메시지

조회수 2016. 7. 9. 08: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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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조금 여유로운 오후 시간대였다. 동부 시간으로는 점심 무렵, 서부 시간으로는 3시쯤? 한국은 잠이 덜 깬 이른 새벽이었다.

네트워크 미디어들 간에 정보를 공유하는 단톡방에 충격적인 '그 사건'이 처음 언급됐다. 물음표 1만개 쯤이 따라붙었다. 부랴부랴. 사실 확인 작업이 시작됐다. 잠시 후,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반 시간도 안돼 (한국어로 된) 첫 보도가 시중에 유통됐다. 각종 포털의 실검 순위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처음 한 두 방울이던 빗줄기는, 금새 폭우로 변해버렸다. 사방에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미처 우산을 준비할 틈도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흠뻑 젖어버렸다.

원망과 아쉬움, 슬픔이 가득 담긴, 그러나 페이소스가 실린 댓글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형, 게이라며....' 

공식 성명과 노 코멘트 선언

그 시간. 그들은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원정이었다.

채 그 사실이 보도되기 전이었다. 어느 미디어가 전한 클럽 하우스의 모습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게임과 관련된 비디오 분석이었다. 별 일 없는 일상적인 얼굴이었다. 최근 타격 부진에 대해서 고민하고, 타격 코치와 문제점을 상의하고 있다는 얘기를 곁들였다.'

이윽고 현장에도 소식이 퍼져 나갔다. 기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파이어리츠는 즉각, 하지만 차분하게 반응했다. 이미 사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있었던 것 같다. 준비된 공식 성명이 나왔다. 프랭크 코넬리 사장 이름으로 된 코멘트였다. '사장(president)'이라는 직함이 사태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번 사건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접근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랬으며 앞으로도 MLB 사무국과 협력을 계속할 것이다."

아울러 하나의 지침과 같은 얘기가 덧붙여졌다. "현재 경찰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 시점에서 논평할 것은 없다. 스태프와 우리 선수들에게도 이번 사태에 대해 코멘트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무척이나 심각한 이 사태에 대해 경찰 조사를 존중해야 한다."

'그냥 벤치에 앉혀 놓는 게 나을텐데'

당사자에 대한 접근은 자유로웠다. 질문이 막힌 적도 없다. 하지만 그 사건과 관련된 것은 누구도, 무엇도, 물을 수 없었다. 동료들 누구에게도, 감독에게도, 대리인에게도 그랬다. 시카고 경찰도 마찬가지다. 사건과 관련한 어떤 정보도 완벽히 차단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일' 자체가 지워질 리 없다. 우리의 머리 속에서, 입을 통해서, 사건은 한시도 멈춘 적이 없다. 오히려 무궁무진한 상상력 속에서 더욱 덩치를 키워나갔다.

'어쩐지 요즘 계속 안 맞는 이유가 있었네.' '아니 시즌 중에 어떻게 저럴 수가.' '이제 완전히 끝난 것 아냐?' 비난과 손가락질과 욕설이 어지러웠다.

냄비 같은 한국 언론과 팬들만 그랬다고? 천만에. 잘 나가는 미국의 굵직한 미디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츠버그로 돌아가서 치르는 주말 3연전 때 홈 팬들은 과연 그에게 박수를 칠 것인가, 아니면 야유할 것인가.'(CBS 피츠버그) '팀도 부담스러울 것이다. 올스타 브레이크까지는 그냥 벤치에 앉혀놓는 게 나을 것 같다.' (ESPN 피츠버그) 이런 여론들이 상당했다.

'그 일'이 보도된 다음날. 팀은 마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를 4번 타자로 출장시켰다.   mlb.tv 화면 

아무렇 지도 않게 4번 자리에 그 이름이

그렇게 실망과 절망, 혼돈이 가득할 무렵이다. 그러니까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이튿날, 6일이었다(한국시간 7일). 클럽 하우스에 출전 선수 명단이 게시됐다. 4번 자리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랬다.

한동안 타격 감이 뚝 떨어졌다. 그러면서 선발에서 빠지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본래 그곳은 그의 자리였다. 마침 전날 대타로 하나 쳤다. 그러니 다시 출전시키는 것이리라.

라인업에 복귀하자 여론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구단은 이미 사태를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다. 자신 있으니 저렇게 기용하는 것이다.' 대략 그런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여기에 호응하듯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혼신을 짜내는 표정으로 뽑아낸 역전 2타점 2루타였다.

역전 결승 2타점 2루타를 치는 장면.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 표정에 역력하다.         mlb.tv 화면

여론에 대한 강력한 진정 효과

유감스럽게도 지금 그에게는 어떤 두둔도 주기 어렵다. 너무나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를 향한 비난과 의심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나마 우리는 나을 지 모른다. 현지 팬들의 눈길은 얼마나 싸늘하겠는가. '듣보잡 동양인 주제에 조금 성공했다고, 그런 파렴치한 일을...' 그런 시각이 왜 없겠는가.

그럼에도 당사자와 피츠버그 구단, 그리고 주변에서는 사건과 관련해 완벽하게 침묵하고 있다. 어떤 변명과 해명도 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메시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말했다시피 허들 감독은 그 이튿날(한국시간 7일) 아무 일 없었던듯 그를 선발 출장시켰다. 4번 타자 3루수였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랬다. (오늘은 벤치. 2출장, 1휴식의 본래 패턴으로 돌아왔다.)

이건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무죄 추정 원칙? 물론 미국이니까 좀 나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걸 정면 돌파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곳인들 여론의 눈치가 왜 두렵지 않겠나.

앞서 밝혔다시피 주요 미디어들까지 모두 주목한 사건이다. 사방에서 경고 사인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그의 선발 출장은 강행됐다. 무려 4번 타자, 3루수로. 평소와 전혀 다른 게 없이 말이다. 감독은 물론이고, 구단의 뚜렷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건 어떤 구구절절한 보도자료보다 훨씬 묵직한 메시지로 전달됐다. 그리고 여론에 대한 강력한 진정 효과를 발휘했다. 패닉과 혼돈이 어느 정도 차분함과 냉정함으로 정리되는 시점이었다.

적어도 무언가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예단하지 말자. 그냥 각자 자기 일을 하자. 그러니까 그는 여전히 우리와 같은 팀이고, 여전히 파이어리츠의 주전 3루수다. 그걸 새삼스럽게 일깨운 것이었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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