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으로부터의 도피

2016. 6. 29.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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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떠남’이 지겨워질 무렵 농가체험
‘우프’로 살아본 아르헨티나 바릴로체

360도 파노라마 풍경이 펼쳐지는 ‘세로 캄파나리오’ 전망대 카페. 노동효 제공

페루 쿠스코에서 세계일주를 하는 한국인 여행자 예솔이를 만났다. 그녀는 타이에서 우연히, 내가 쓴 책을 발견해서 읽었다고 했다. 독자이자 페친인 분이 빠이의 헌책방에 놓고 왔다는 책. 예솔이는 저자를 남미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며 반가워했다. 반갑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저씨, 중남미에선 얼마나 더 여행할 거예요?”

“글쎄, 2년이 될지 3년이 될지. 워낙 넓은 땅이라.”

“그렇게 오래요? 난 8개월인데도 지치는데. 처음 한국을 떠났을 땐 정말 날아다녔어요. 근데 언제부턴가 설렘이라고 할까, 열정이 사라진 것 같아요. 뭘 봐도 그게 그거 같고.”

“많은 여행자들이 오래 여행을 하다 보면 그런 상태가 돼. 처음엔 꾹 눌러놓은 용수철처럼 에너지가 넘치지. 그러다가 튀어나갈 만큼 나가면 탄성이 사라져. 그럴 땐 스스로 용수철을 눌러줘야 돼. 삶에서 노동, 공부, 놀이, 휴식, 네 가지가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활력이 솟지 않아. 공부만, 일만, 그러면 삶이 재미가 없잖아. 놀이나 휴식도 마찬가지지. 오래 놀거나 쉬어도 늘어져. 뭘 봐도 시큰둥하고, 뭘 해도 흥미가 안 생기고.”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예요. 이럴 땐 어떻게 해결하죠?”

“집을 렌트해서 한 도시에서 머물며 생활하거나, 한시적인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방법이지. 정시에 기상하고, 노동하고, 퇴근. 그러다 보면 자유에 대한 갈망이 샘솟고, 어느 순간 탕! 하고 튀어나갈 탄성이 생길 거야. 정식 일자리는 아니지만 중남미엔 공동체, 그러니까 ‘커뮤니티’라는 게 곳곳에 있어. 하루 6~8시간 일하면 숙식을 제공해주지. 과수원, 농장, 집짓기 등등. 주로 히피들이 떠돌다가 정착하고 싶은 곳이 생기면 이 시스템을 활용해. 땅을 산 뒤 함께 집을 짓고 밭을 가꿀 사람을 구하려고. 주인도 히피고 손님도 히피, 상상이 가니? 하하하. 또 다른 방법으론 우프가 있지.”

“우프가 뭐죠?”

“각국 우프 협회에 가입한 농장에서 하루 6시간, 일주일에 5일 일하고 숙식을 제공받아. 우리나라에선 영어연수 개념으로 활용하다 보니 영어권 나라에만 우프 농장이 있다고 여기는데 중남미에도 있어. 연회비가 3만~4만원 수준이니 며칠 숙박비 낸 셈 치면 돼. 스페인어도 배우고 현지문화도 체험하고.”

파타고니아 들머리 '남미 알프스'
허브 농장에서 지낸 20일
일하고 먹고 잠자는 규칙적인 생활에
여행자의 야성이 깨어난다, 배낭을 맨다

360도 파노라마 풍경이 펼쳐지는 ‘세로 캄파나리오' 전망대 카페. 노동효 제공

예솔이랑 헤어진 지 몇 달 후 나는 라틴아메리카 우프 협회에 가입했다. 말하자면, 여행으로부터의 도피. 아르헨티나 전국에 180여개 농장이 일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점찍은 지역은 아르헨티나 바릴로체. 여행기 <파타고니아> 등을 쓴 영국 작가 브루스 채트윈이 사랑한 파타고니아의 초입, 사람들은 ‘남미의 알프스’라고 불렀다. 설산 아래 크고 푸른 호수들이 점점이 널린 나우엘우아피 국립공원 가운데 호변도시,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의 삶은 어떤 걸까? 호숫가 농장을 찾아내 메일을 보냈다. 무엇보다 ‘독방 제공’이 마음에 들었다. 아침에 메일을 여니 답장이 와 있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일하면 됩니다. 이 주소로 찾아오세요.’

바릴로체 허브농장 창고의 다락방. 파타고니아 지방의 대표적인 목조주택이다. 노동효 제공

바릴로체 시내에서 버스로 10분. 할머니와 아들 막심, 며느리 그레이스가 운영하는 허브농장이었다. 막심네 집에서 묵기로 했는데 막심이 농장창고 위 다락방을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철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높다란 천장, 넓은 방. 창밖으로 전나무 숲이 보이고,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마루의 느낌이 좋았다.

“맘에 드는걸. 난 여길 사용할게.”

“우리 아들이 워낙 말썽을 피워서 여기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야.”

아침 8시 반에 기상. 막심네 집으로 건너가 아침식사. 오전엔 허브를 포장하는 작업을 했다. 그날 출하량을 차에 싣고 막심이 시내로 나가면, 그레이스와 함께 모종을 옮겨 심거나 채소밭에 물을 뿌리거나 가래질을 하거나. 유기농 농장이고 농기계라고 해봐야 제초기가 전부. 삽질에 곡괭이질.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니 사흘 동안은 죽은 듯 잤다. 그러곤 적응. 저녁엔 시내로 나가 영화를 보고, 맑은 날엔 호숫가에서 수영을 하고, 주말엔 산봉우리에 올라 호수를 내려다보다 돌아오는 규칙적인 생활.

농장의 온실. 씨앗에서 자란 모종을 키우거나 바질, 라벤더, 로즈메리 등 허브를 말린다. 노동효 제공

티브이(TV)도 인터넷도 없지만 무료하진 않았다. 하긴 아르헨티나 가족 시트콤을 보고 있는 듯 지루할 틈도 없었으니까. 출연진은 할머니, 아들, 며느리, 유치원생, 초등학생, 갓난애. 막심의 두 아들은 인간 청개구리들. 막심과 그레이스가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고 “그만 둬!”라고 야단을 쳐도 멈추질 않았다. 막심은 사슴 사냥이 취미인 마초형 사내였는데 아이들에겐 알밤조차 먹이지 않는 게 신기했다. 제멋대로인 두 아들을 보며 ‘뻑’ 하고 혼자 소릴 지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은 오히려 <오빠가 돌아왔다>의 아비꼴이었다.

막심이 읽던 책인지 다락방엔 유년 시절 내가 좋아한 잭 런던의 소설이 먼지 묻은 채 뒹굴었다. 잭 런던은 <강철군화> 이후 쓴 모험소설의 인기와 대중성 때문에 문학사에서 과소평가된 작가 중 한 사람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소설은 재밌고 쉽게 읽히지만 대중성으로 폄하할 수 없는 심오한 메시지가 깃들어 있었다. 책장을 넘긴다. <야성의 부름>. 야성을 되찾은 동물은 두 번 다시 울타리 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울타리 안으로 돌아가면 따뜻한 잠자리와 배불리 먹을 음식을 구할 수 있을지라도. 울타리 안의 안락에 익숙해지면 울타리 안의 ‘허락’을 ‘자유’로 착각한다. 그리고 망각한다. 울타리 안에 있다는 ‘진실’을.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호변 휴양지로 ‘남미의 스위스’로 불리는 산카를로스 데 바릴로체. 노동효 제공

20부작짜리 시트콤이 종영을 앞둔 밤이었다. 펭귄이 발차기라도 했는지 바람이 차가웠다. 전나무 숲이 흔들리고, 반달이 전나무 꼭대기에서 어디로 갈까, 주춤거린다. ‘그래도 떠나야지.’ 아침에 일어나 마지막 식사를 하는데 막내아들이 물었다.

“로 삼촌, 꼭 떠나야 돼? 이제 가면 언제 또 와?”

“할머니께서 네가 아빠 엄마 말을 잘 듣고 있다고 알려주시면 올게.”

내 대답에 호세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어이 솔저, 다 준비했나? 자 이제 출발!” 막심이 등교를 시키려 현관 앞에서 시동을 걸자 호세가 내 다리를 붙잡더니 끌어안았다. 말썽꾸러기 녀석, 언제 이렇게 정이 들었나. 젖은 눈을 내 바짓가랑이에 비비고 돌아서며 호세가 말했다. “초등학생이 되면 엄마, 아빠 말 잘 들을게. 그럼 꼭 와.”

두 아들을 유치원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막심이 시내까지 데려다주겠단다. 호수변을 달려 차는 버스터미널 앞에 섰다. 배낭을 메는데 막심이 손을 내밀었다. “여행하다가 아르헨티나에 또 들르면 우리 집에 와서 지내. 하긴 나뿐 아니라 도처에 친구들이 있겠지. 대답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아. 다시 보자, 로.”

노동효 여행작가

막심을 보내고 터미널 건물을 향해 걸었다. 스무날 동안 용수철을 꾹꾹 누른 덕분인지 발걸음이 통통 튀었고 세상이 다시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느껴지는 자유의 냄새. 자, 다시 여행이다!

노동효 여행작가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호변 휴양지로 ‘남미의 스위스’로 불리는 산카를로스 데 바릴로체. 노동효 제공
농장 주인 그레이스. 대부분의 농장 일과 허브 이름들을 그에게서 배웠다. 노동효 제공
열흘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방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인 바릴로체 숙박업소 ‘1004 호스텔’의 테라스. 노동효 제공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호변 휴양지로 ‘남미의 스위스’로 불리는 산카를로스 데 바릴로체. 노동효 제공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호변 휴양지로 ‘남미의 스위스’로 불리는 산카를로스 데 바릴로체.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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