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칼럼] 누군가의 불행으로 얻은 평화

2016. 6. 1.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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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내 나라 대통령도 기가 찬데 남의 나라 대통령 당선자를 비판하려니 찝찝하다. 필리핀의 대통령 당선자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전력과 선거공약, 당선 뒤 내뿜는 호기로운 발언을 들으면 소름이 끼치는 것만이 아니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실제로 필리핀 여행은 절대로 안 간다는 결심까지 하게 만든다.

그는 다바오라는 시의 시장을 20년 넘게 했다. 세 번 연임이 불가능하자 중간중간 아들과 딸을 시장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시장 자리에 앉았다. 물론 선거를 통해서다. 부정선거라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총기 사용이 자유롭고 얼마든지 사병을 거느릴 수 있고 몇백달러면 청부살인을 맡길 수 있다. 범인이 경찰인지 살인자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는, 치안이 엉망인 나라가 필리핀이다. 그는 다바오 시장으로 재직하며 마약과 총기와 범죄로 들끓던 도시를 세계에서 5번째로 안전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었다. 무슨 전지전능인가.

자경단이란 이름의 즉결처분자들을 통해 범죄가 의심되는 사람을 1700여명 죽였다는 보도가 있다. 재판 없이 죽인 즉결처분, 그러니까 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깨끗한 시가 되고 관광객이 몰려들고 투자도 늘었다고 한다. 얼마나 불안에 떠는 삶이었으면 38%의 국민이 두테르테를 대통령으로 뽑았을까. 그러나 필리핀 국민에게 앞으로 무서운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대통령으로 확정되자 그는 앞으로 장의사를 하면 좋을 거다, 범죄자 10만명을 몰살시킬 테니까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온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코미디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세계는 자국우선주의, 소위 강한 정부, 난마처럼 얽혀 있는 국제정세와 삶의 불안요소들을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으로라도 해결해주는 정부를 원하는 추세로 가고 있다. 그만큼 지금의 세계가 위험하고 그것의 악순환이 가져올 미래에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트럼프는 언젠가 난민과 이민의 유입을 막기 위해 담을 쌓겠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난 그 담이 어떤 것인지 영화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리고 있는 ‘아랍영화제’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거기에 진짜 무서운 담이 있었다.

영화 <스피드 시스터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사는 여성 레이싱팀의 이야기다. 난민촌에서 자유롭게 카레이싱을 펼칠 수 있을뿐더러 그들의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생활, 여성 카레이싱팀에 보내는 팔레스타인 남성들의 환호에서 아랍 여성의 지위에 대한 선입관도 덜어졌다. 난민촌이라 해도 얼핏 자유스러운 삶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기에 무서운 담이 있었다.

거대하게 높은 담으로 양쪽을 막아놓고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 동물의 우리나 감옥 같은 곳의 요소요소에는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철저하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느닷없이 교통을 막고 방어막을 치고 언제든지 검문검색을 하고 두겹 세겹의 철책을 친 외곽에서 아이들은 가끔 돌멩이를 던지고 소리를 지른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어김없이 그들의 몸을 겨냥해 총을 쏜다. 아무런 항의도 못한다. ‘움직이면 쏜다’이다.

누군가의, 어떤 민족인가의 감옥생활이나 죽음으로 세계가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는 말인가. 필리핀 국민은 그나마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불행한 선택’을 했다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불행조차 선택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이 세계의 최대 악인가. 이 세계의 진정한 악은 무엇이고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떤 민족의 불행으로 세계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들이 안락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환상이다. 그 누군가가 내가, 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바오시에서 죽은 1700명과 앞으로 필리핀에서 죽을 10만명이 과연 필리핀 최대의 악일까.

총선 때 어떤 후보의 포스터에서 본 ‘좌익 척결’ ‘세월호 척결’이라는 공약과, 철책은 없지만 고립된 삶을 사는 북한의 모습까지 섬뜩하게 오버랩된다.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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