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는 '삼장법사' 이야기, 실은 이렇다

이상기 2016. 5. 3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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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대문화 들여다보기 ⑥] 대안탑과 대자은사

[오마이뉴스이상기 기자]

 대자은사와 대안탑
ⓒ 이상기
서역으로 법을 구하러 간 승려들은 얼마나 될까? 그들은 언제부터 떠났을까? 그들이 살아 돌아와 남긴 기록은 어떤 게 있을까? 그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는 자은사, 흥선사, 천복사를 찾아가려고 한다. 첫 행선지가 안탑구(雁塔區)에 있는 대안탑이다. 자은사 앞 광장에는 시티투어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아침 일찍인지라 아직 운행을 안 하는 것 같다. 절 앞 매표소에서 표를 끊은 다음 안으로 들어간다.

자은사 정문인 남산문(南山門)에는 대자은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여기서 자은이라는 글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은은 자은종(慈恩宗)의 준말로, 유식종(唯識宗)과 법상종(法相宗)과 같은 말이다. 이 종파는 현장법사가 인도로부터 가지고 들어온 불교의 유파로, 공(空)사상과 미륵신앙으로 대표된다. '인연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법은 공하다'는 것이 공사상의 핵심이다. 미륵신앙은 도솔천에 계시는 미륵보살이 때가 되면 이 세상으로 내려와 널리 불법을 펴고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안탑신종
ⓒ 이상기
이름을 통해 우리는 자은사와 현장법사의 연관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남산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종루와 고루가 있다. 종루에는 명나라 때인 1548년(嘉靖 27) 만든 15t짜리 종이 걸려 있다. 종에는 안탑신종(雁塔晨鐘)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관중팔경(關中八景)과 관련이 있다. 안탑에서 울려 퍼지는 새벽 종소리가 서안과 함양을 중심으로 한 관중지방의 팔경 중 하나라는 얘기다. 관중팔경에 대해서는 비림박물관 편에서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대자은사는 남산문, 대웅보전, 도솔(兜率)전, 대안탑, 현장삼장원으로 이어지는 중심축 좌우에 당우와 누각을 배치한 형태로 되어 있다. 우리는 대웅보전과 도솔전을 지나 대안탑까지 올라갈 것이다. 시간이 있으면 모란꽃이 피어있는 모란정(牧丹亭)과 이 절 출신의 큰 스님들을 기리는 승탑으로 이루어진 탑림(塔林)을 볼 수 있다.

 대웅보전 편액과 주련
ⓒ 이상기
대웅보전은 대자은사의 중심 법당이다. 법당 중앙 위쪽으로 조박초(趙樸初)가 쓴 편액이 걸렸고, 문 양쪽으로 주련이 걸렸다. 주련의 내용을 살펴보니 현장법사에 대한 찬양이다.

불법의 바다가 현장 스님을 우러러 보았으니        法海仰?公
서쪽 인도에서 그를 두루 깨친 분이라 일컬었다.   西土亦稱大遍覺
유식학을 으뜸으로 널리 펼치셨으니                   宗學弘唯識
이곳을 감히 나란다에 비유할 수 있겠네.             此地堪比那爛陀

 석가보니불을 협시하고 있는 아난과 가섭
ⓒ 이상기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상이 있다. 아난은 다문(多聞) 제일로, 출가 후 25년간 석가모니를 시봉하며 그의 말씀을 들었다. 그 때문에 제1차 불전결집 때 불경 편찬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가섭은 두타(頭陀) 제일로 제1차 불전결집을 주재했다. 그러므로 법장을 완성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그는 불교교단의 실질적 후계자가 되었고, 탐욕과 번뇌를 버리고 오로지 수행정진에 몰두했다.

석가모니불의 뒤쪽 후벽에는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과 행원의 상징인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이들 불상, 보살상, 나한상은 모두 흙으로 만든 소조상이다. 그중 문수보살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명나라 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소조상은 명말청초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들 소조상 말고도 동서 양측 벽면에는 18나한상이 부조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가 아는 16나한에 자씨(慈氏)존자와 대편각(大遍覺)존자가 들어간다. 여기서 자씨존자는 자애로운 분이고, 대편각존자는 두루 깨달은 분이다.

 도솔전
ⓒ 이상기
대웅보전을 지나 대안탑 방향으로 가다보면 도솔이라는 편액을 한 법당이 나타난다. 여기서 도솔은 도솔천(兜率天)의 준말로 미륵보살이 머무는 천상의 정토(淨土)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곳에 모셔진 부처님이 미륵보살이 된다. 도솔전과 미륵보살은 앞에서 언급한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다. 미륵보살은 높이가 2.93m나 되는 금동불로, 화려한 광배를 하고 있다. 광배까지 합하면 높이가 4.16m나 된다.

우리는 이제 대안탑으로 들어간다. 이 탑은 당나라 고종 때인 652년 현장법사가 천축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불경과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5층으로 세워졌다. 측천무후 때인 701년 이 탑은 사각칠층탑으로 증축되어 현재 탑의 원형이 되었다. 대안탑은 그 후 여러 번 수리와 해체를 거듭하다, 청나라 강희제 때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되었다. 현재 탑의 높이는 64.1m이고, 1954년 설치한 계단을 통해 최상층까지 올라갈 수 있다.

 대안탑
ⓒ 이상기
탑의 1층에는 현장부급상(玄?負?像), 현장역경도(譯經圖), 불설법전당도(佛說法殿堂圖), 명청시기 안탑이라는 제목으로 새긴 석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벽의 일부를 노출시켜 당나라 때 벽돌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제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면서 보니 매층 중앙에 불상, 경전, 사리탑, 종, 와당 등을 안치해 놓았다. 종에는 만력(萬曆) 32년 중수라는 명문이 있어, 1604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사방으로 창문을 통해 서안 시내의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남쪽으로 현장법사 동상이 있는 광장이 보이고, 북쪽으로 분수가 있는 광장이 보인다. 분수광장 좌우에는 2003년에 지은 현장법사 기념관도 보인다. 대안탑과 대자은사는 이처럼 삼장법사로 시작해서 삼장법사로 끝난다. 대자은사를 찾은 많은 문장가들이 대안탑을 오르고 여러 가지 형태의 글을 남겼다.

 대안탑 안의 불상
ⓒ 이상기
그중 나는 도과(Path & Fruit)선원 원담(圓潭)스님의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좋아한다. 대안탑과 현장법사의 관계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전반부 2행에서 대안탑의 우뚝함을 표현했고, 후반부 2행에서 현장법사의 위대성을 이야기했다. 

탑에 오르니 세계를 벗어난 듯                              登臨出世界
7층 꼭대기가 창공에 맞닿아 있구나.                    七層摩蒼穹
유식이 중국에 빛나는 건                                      唯識輝華夏
법사께서 대승을 하늘처럼 받들었기 때문이니라.    師尊大昇天

그런데 전반부 2행은 잠삼(岑參)의 시 '고적설거등자은사부도(高適薛據登慈恩寺浮圖)'에서 빌려왔다. 이 시는 오언고시(五言古詩)로 잠삼이 고적, 설거와 함께 자은사 대안탑에 오르고 난 다음의 감회와 결심을 표현했다.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시 만한 것이 없다.

천축국으로 법을 구하러 간 현장법사 이야기

 대자은사 앞의 현장법사 동상
ⓒ 이상기
현장 이전에 천축국으로 법을 구하러 간 승려는 누구일까? 무수히 많겠지만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승려는 손에 꼽을 정도다. 5세기 육로와 해로로 인도를 다녀온 법현(法顯), 6세기 육로로 인도를 다녀온 송운(宋雲)과 혜생(惠生) 정도가 기록을 남겨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법현이 남긴 여행기가 <불국기(佛國記)>고, 송운과 혜생에 대한 이야기가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17년간 인도를 체험하고 돌아와서 쓴 현장의 여행기 <대당서역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여행기는 양과 질 모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역사기록이기 때문이다. 총 12권 10만여 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불교뿐 아니라 138개국에 대한 총제적인 지식이 집적되어 있다. 특산품, 풍토, 생활과 풍속, 산천과 지리, 문화유산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서역으로 가는 현장법사상
ⓒ 이상기
현장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그중에서도 유식을 공부하기 위해 인도에 갔다. 그런데 현장은 출발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그것은 나라에서 서역으로 모든 가는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 태종 때인 629년 몰래 장안을 출발 란주(蘭州)로 향했다. 계속해서 서쪽으로 간 현장은 양주(凉州)에 이르러 1개월간 머문 다음 옥문관을 넘어 끝없는 사막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혜립(慧立)과 언종(彦悰)이 지은 <대자은사 삼장법사전>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인적은 물론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없는 망망한 천지가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밤에는 귀신불이 별처럼 휘황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 두려운 줄 몰랐다. 물이 없어 심한 갈증이 나고 걸을 수조차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5일 동안 물을 한 방울도 먹지 못해 입과 배가 말라붙고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었다. 법사는 마침내 모래 위에 엎드려 수 없이 관세음보살을 외웠다."

그리고 17년째인 645년 1월 그는 불경과 불상을 가득 싣고 장안으로 금의환향한다. 그를 맞이한 건 서역으로의 출입을 금했던 태종이었다. 그 후 현장법사는 홍복사(弘福寺)에 주석하면서 646년 7월 <대당서역기> 12권을 완성했다. 그리고 648년 대자은사에 주석하면서 불경의 번역에 몰두했다. 그가 번역한 책은 <반야바라밀다경> 등 74부 1335권에 달한다. 그의 구법행적은 16세기 오승은(吳承恩)에 의해 <서유기(西遊記)>로 각색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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