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빨' 로맨스 그만하시지요

2016. 5. 2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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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안인용의 ‘좋아요’가 싫어요

여성이 마주하는 일상적인 공포와 여성에게 벌어지는 폭력을 로맨스로 둔갑시키고 그런 장면에서 등장하는 남성을 멋진 남자로 그려내는 드라마는 수없이 많다. 티브이엔 드라마 <또 오해영> 역시 공포를 로맨스의 장치로 사용하는 데 그치고 있다. 티브이엔 제공

티브이엔(tvN) 드라마 <또 오해영>의 주인공 오해영(서현진)은 혼자 산다. 박도경(에릭)과 문 하나를 두고 사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자기 집에서 혼자 산다. 오해영은 음식을 배달시킬 때, 택배를 받을 때 있지도 않은 “자기”를 부른다. 집 안에 동거인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안전하기 때문이다. 오해영의 이런 행동은 이 땅에 사는 거의 대부분의 여성에게 일상이다. 혼자 살지 않아도 집에 가족이 아무도 없을 때 낯선 사람과 현관문을 두고 마주할 때 습관처럼 있지도 않은 누군가를 부르는 것은 최소한의 자기방어다.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갈 때 혹시 누가 쫓아올까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골목길은 말 그대로의 골목길뿐만 아니라 사람이 드문, 한적하거나 고립된 모든 장소를 말한다. 이 드라마에서 ‘보통 여자’ 캐릭터를 맡고 있는 오해영은 마주하는 일상의 공포를 방어하느라 애쓴다. 그렇다고 공포에 짓눌려 있기만 한 캐릭터는 아니다. 할 말은 한다. 자기 감정에 솔직한 오해영과 박도경의 직진하는 러브라인은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보통의 일상과 보통의 캐릭터를 포착해내는 힘 덕분인지 <또 오해영>은 케이블 드라마임에도 시청률 7.8%를 기록했다.

이 드라마에서 오해영이 마주하는 공포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3회에서 오해영은 집 열쇠가 없어 박도경을 기다리다가 어두운 골목을 걸어간다. 그때 검은색 재킷에 모자를 쓴 남자가 오해영의 뒤를 쫓는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박도경의 눈에 오해영과 낯선 남자의 모습이 보이고, 박도경은 오해영에게 달려가 그녀를 구해낸다. 같은 회에서 오해영은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배달시킨다. 배달원은 오해영에게 “혼자 사시나봐요?”라고 묻는다. 그러고는 잔돈이 없다며 다시 오토바이로 갔다가 헬멧을 벗고 거울을 본 다음 다시 오해영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 순간을 목격한 박도경은 오해영의 집으로 뛰어들어가 마치 동거인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게 박도경은 오해영을 또 구해낸다. 박도경은 오해영에게 “혼자 산다고 광고하냐? 저놈 잔돈 있었어”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신발을 오해영의 집 현관에 놓는다. 오해영은 “겁 없이 함부로 감동 주고 지랄이네”라고 혼잣말을 한다.

‘또 오해영’ 오해영은 혼자 산다
‘운빨 로맨스’ 심보늬도 혼자 산다
공포는 이들의 일상
낯선 또는 아는 남자로부터의 폭력
폭행·강간·살인의 위험

드라마는 이 공포를
로맨스의 장치로 사용한다
남자 주인공이
멋있는 남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현실에선 여성들이 다치고 죽어간다
아무리 환상을 사고파는 산업이지만
환상이 현실서 벌어지는 일들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면…

어두운 골목길과 자신의 집에서 오해영에게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은 무엇일까. 강간이나 살인이다. 이것이 매일 여성들이 마주하는 공포라는 걸 상기시켜주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공포를 로맨스의 장치로 사용한다.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장면은 범죄가 일어나기 직전의 현장이다. 이 현장에 남자 주인공을 슈퍼맨처럼 등장시켜 여자 주인공을 구한 다음 감동시킨다. 이 장면들은 여성들이 겪는 일상의 공포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보호하는 멋있는 남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강간과 살인이라는, 심장이 더이상 뛰지 않을 수도 있는 공포를 ‘심쿵’ 로맨스로 바꿔버린다. “혼자 산다고 광고하냐?”라는 박도경의 말과 그가 내주는 자신의 신발은 오해영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범죄의 빌미를 준 것처럼 보이게 한다. 또 여성이 처한 일상의 공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남자를 보호자로 두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오해영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들은 또 있다. 오해영의 부모다. 오해영이 자취를 시작하자 오해영의 부모는 방범창부터 도어록까지 새심하게 챙긴다. 오해영은 32살 성인이지만 부모와 옆집 남자의 보호 안에서 비로소 안전을 확보한다.

이 드라마는 음식점 배달원이나 택배기사 등 낯선 남자를 오해영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으로 설정해놓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이들보다 더 위험한 인물은 박도경이다. 5회에서 박도경은 오해영과 또다른 오해영(전혜빈)을 동시에 마주하자 갑자기 완력을 이용해 오해영의 손목을 끌고 나간다. 오해영을 차에 태운 다음에는 갑자기 주먹으로 자동차 유리를 친다. 오해영과 또다른 오해영은 그 모습에 놀라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유리는 깨지고 주먹에서 피가 나지만 박도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몰고 나간다. 8회에서는 박도경이 자신의 자동차로 오해영과 파혼한 남자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뒤에서 들이받는다. 박도경은 자신의 감정을 폭력으로 드러내는 위험한 사람이다. 폭력성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에 따라 자신보다 약자인 연인이나 가족을 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박도경의 이러한 폭력성을 오해영과의 로맨스에 활용한다.

박도경이 오해영의 손목을 끌고 나가는 장면에서 오해영은 박도경에게 화를 낸다. 한국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손목을 멋대로 끌고 나가거나 몸을 잡아끌면서 그것이 로맨틱한 행동인 것처럼 포장하는 장면은 흔하다. 현실에서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끌고 나가면 여자의 손목에는 시퍼런 멍이 들고 경찰서에 가야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그저 로맨스를 극대화하는 장면일 뿐이다. 그렇기에 오해영이 박도경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드라마가 나왔구나 싶었다. 그러나 화를 내는 포인트가 영 이상하다. “내 손목이 그 기집애 화나게 하는 데 갖다 쓰는 소모품이야? 날 그 따위로 쓰지 마. 엄청 미안한 거야, 그거.” 박도경이 오해영에게 미안해야 하는 건 맞다. 그러나 그 이유는 틀렸다. 오해영을 이용해 또다른 오해영의 질투를 유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해영의 의사와 상관없이 함부로 손을 대는 폭력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 역시 다르지 않다.

문화방송(MBC) 드라마 <운빨 로맨스>가 지난 수요일 첫 방송을 시작했다. 이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 심보늬(황정음)도 혼자 산다. 2회에는 심보늬의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최건욱(이수혁)이 심보늬의 옆집으로 이사오는 장면이 방영됐다. 최건욱은 둘이 아는 사이라는 것을 숨긴 채 이웃으로 심보늬에게 다가간다. 최건욱은 심보늬에게 망치를 빌리고, 손이 다쳤다면서 반창고도 빌린다. 여기까지는 호의와 친절이다. 심보늬가 현관 문을 닫으려 하자 최건욱은 밥을 사겠다며 현관문을 닫지 못하게 막는다. 심보늬가 단호하게 거절하고 문을 닫으려고 하자 또 힘으로 문을 닫지 못하게 막는다. “사소한 친절을 호감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려고 하자 심보늬는 문밖으로 튕겨져 나온다. 이쯤 되면 여자 주인공이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게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 전개지만, 이 드라마는 갑자기 최건욱을 심보늬가 애타게 찾던 ‘호랑이띠 남자’로 만들면서 둘의 로맨스를 시작해버린다. 그다음날에는 남자 주인공 제수호(류준열)가 또 심보늬의 집을 찾아오고 돌아가라는 심보늬의 말에도 불구하고 현관문을 닫지 못하게 발로 막는다. 물론 이것도 로맨스로 포장된다.

여성이 마주하는 일상적인 공포와 여성에게 벌어지는 폭력을 로맨스로 둔갑시키고 그런 장면에서 등장하는 남성을 멋진 남자로 그려내는 드라마는 수없이 많다. 지금 방영되는 드라마들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두 편의 드라마에서, 그것도 할 말 다 하는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찾아낸 게 이 정도다. 칼럼의 분량 때문에 언급하지 못한 장면도 수없이 많다. ‘운빨 로맨스’라는 말은 지금 한국 드라마를 설명하기에 딱 좋은 단어다. 한국 드라마의 여성 인물들은 모두 운이 좋아 살아남은 이들이다. 그 모든 공포의 순간들을 단지 운이 좋아서, 남자 덕분에 이겨내고 살아남은 이들의 로맨스가 지금 한국 드라마의 이야기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운빨 로맨스는 이제 그만하자. 현실에서 여성들이 다치고 죽어간다. 여성 인물들이 드라마 속에서 마주하는 공포와 폭력의 현장을 로맨스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 현장에서는 여성 캐릭터가 그것을 공포라고, 폭력이라고 말하고 거부하도록 해야 한다. 제아무리 드라마가 환상을 사고파는 산업이라고 하지만 그 환상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면 결국 시청자도 그 드라마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쓰고 만드는 이들이 스스로 변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시청자의 힘도 필요하다. 여성혐오에 기반한 서사와 장면들이 더이상 전파를 타지 못하도록 더 자주 언급하고 항의하자. 시청자 대신 이런 문제를 감시하는 단체에 힘을 실어주자. 운빨 로맨스가 아닌 진짜 로맨스를 기대한다.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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