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물건 못파는 영업사원 심정" 遺書.. 초임 검사의 죽음

강훈 기자 2016. 5. 2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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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장짜리 유서 남겨.. "그만둔다고 하면 영원히 실패자로 낙인" 일선 검사 과도한 업무.. 형사부 소속 검사 한 명이 하루 10개 안팎 사건 처리

지난 19일 서울남부지검 김모(33) 검사가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찰은 업무 스트레스가 극단적 선택의 원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일부에선 혈기 왕성한 검사가 자살하자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하지만 그가 남긴 두 장짜리 유서에는 업무 중압감을 호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2009년 제51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김 검사는 법무관을 마치고 작년 4월 서울남부지검 형사부에 부임했다.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 사건을 주로 맡았고 일 잘하는 총각 검사로 알려졌다고 한다. 서울대 법학과 그의 동문들은 "성격 활달한 착한 친구" "잘생기고 운동 좋아하는 친구"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다.

김 검사가 자필로 쓴 유서는 "일이 너무 많다. 쉬고 싶다"로 시작했다. 이어 "업무,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고 밀리기만 한다"고 했다. 업무 부담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부분도 보였다. "돌아오는 장기(長期) 사건들이 목을 조인다. 해결책은 보이지 않고 하루 종일 앉아서 보고 있어도 사건은 늘어만 간다. 물건을 팔지 못하는 영업 사원들의 심정이 이렇겠지."

덜 바쁜 곳으로 전보(轉補)를 자청하거나 변호사 개업을 생각해보지는 않았을까. 그는 유서에서 "그만둔다고 하면 영원히 실패자로 낙인찍혀 살아야겠지. 병원에 가고 싶은데 병원 갈 시간도 없다. 탈출구는 어디에 있을까"라고도 했다. 유서는 "한 번이라도 편한 마음으로 잠들고 싶다. 스트레스 안 받고 편안하게…"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자살 전날에도 야근을 한 김 검사는 동료에게 "씻고 잠시 눈 붙이고 나오겠다"고 한 뒤 귀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죽음을 놓고 사설 정보지에선 "직장 상사가 부당한 수사 지시를 내렸다"는 등 얘기가 돌았다. 하지만 유서엔 가족과 친구들 외에 다른 사람이나 특정 사건을 언급한 내용은 등장하지 않았다. 김 검사는 최근 주변 사람들에게도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검사들의 업무량은 적은 게 아니다. 형사부 소속 검사 한 명이 맡는 사건이 한 달 평균 150~300건이다. 하루 평균 10개 안팎의 사건을 처리해야 하며, 복잡한 사건의 경우 하루 1건 처리하기도 벅찬 경우가 있다. 같은 방에 근무하는 계장 등 수사관들이 일은 다하고 검사는 도장만 찍는 시절이 있었다지만, 옛날얘기다. 요즘 검찰에서 비중 있는 사건은 검사가 직접 조사해야 하고 수사관들이 조사하는 사건도 검사가 수시로 기록과 자료를 체크해야 한다. 검사장 출신 한 변호사는 "과거 수사관이 하던 일을 검사가 하고, 검사가 하던 일을 부장검사가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면서 "이렇다 보니 수사관 사이에선 업무 권한이 과거보다 줄어들었다는 푸념이 나온다"고 했다.

여기에 주요 사건 보고와 정보 보고, 기획 등 부가 업무에 경찰 사건 지휘까지 검사의 몫이다. 사건을 대충대충 처리한다면 업무 부담이 적을 수 있겠지만, 빈틈 보이지 않는 완벽주의 성격의 검사라면 하루 종일 일에 파묻혀도 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 김 검사의 유서에도 "처리되지 않는 사건을 보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진다"는 대목이 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평검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검사는 큰 의자에 앉아 경찰 수사 트집이나 잡는 한가로운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말 피곤하고 바쁜 직업"이라고 했다. 2011년에도 대전지검 한 평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검사도 과도한 업무 부담이 자살 원인으로 추정됐다. 수도권에 근무하는 한 차장검사는 "초임 5~6년을 잘 버티면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지고 요령도 생기지만 검사에 따라선 그 기간이 무척 힘겹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검찰청은 일선 지방검찰청에 모든 검사의 업무량 실태 파악을 지시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업무를 잘 분담해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한 부장검사는 "김 검사의 죽음은 우리 선배들의 잘못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유족에게 미안할 따름"이라면서 "젊은 검사는 업무 부담에 몰려 유명을 달리하고, 퇴임한 간부는 법조 비리에 연루돼 수사받고, 조직 분위기가 참 어수선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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