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 - 123
나는 행복을 '다행'이라 바꿔 부르는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다. '돈'을 버는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안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안다. 4년 전의 나는 불행해지지 않는 것보다 행복해지는 쪽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젠 어쩌면 꼭 그런 게 아닐지 모른단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행복'이 '행운'과 관련 있는 말이 아닐까란 생각을 종종하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과 개인적인 여러 일들을 겪게 되면서 생긴 또 다른 삶의 감각이다.
이제 나는 종종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해야 하지만 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 말하게 된다. 앤과 함께 3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지금, 이제 '결핍'을 채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어쩌면 '과잉'을 덜어내는 쪽이 아닐까란 생각도 한다. 나이에 따라 내려야 하는 처방이 다르다는 것도 이제 알겠다. 살아보지 않은 나이를 예상한다는 것도 어쩌면 부질없다는 것도.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면 사는 게 한결 편해진다. 실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린드 아주머니나 마닐라 아줌마가 앤에게 하는 말은 자신들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증언이다.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일들을 겪었을 테고, 그래서 축적된 지혜를 앤에게 이야기해준 것이다. 이젠 그걸 알기 때문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앤의 말도 맞지만 내 말도 맞아, 라고. 사람은 바뀐다. 시간이 하는 일은 대개 속도가 느려서, 다만 자신도 모르게 바뀌어 있을 뿐이다.
김소연의 '마음 사전'을 읽다가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이제는 다가갈까, 기다릴까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게 됐다. 이것은 살아온 날들이 만든 현명한 태도이지만은 않다. 정념의 불꽃을 다스렸다는 것도 절대 또한 아니다. 소중한 것들이 내 품에 들어왔던 기억, 그 기억에 대해 좋은 추억만을 갖고 있지 않기에, 거리를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일종의 비애인 셈이다. 나를 충족시키는 경우보다 결핍 그대로가 더 나은 경우를 경험해 보았다. 그것은 나만을 생각했던 시절들을 지나와서 관계 자체를 배려하게 됐다는 뜻도 있지만, 그 배려에는 쓰디쓴 상처의 흔적들이 배어 있다. 지켜보고 있음이 꽤 오랫동안 변치 않는 은은한 기쁨을 선사해줄 거라는 패배 비슷한 믿음 또한 있다. 그러므로 바라던 것이 나에게 도래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바라던 것들이 줄 허망함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외면'이란 감정의 부축을 받으며."
이런 문장은 마흔이 넘어야 쓸 수 있다. 앤의 나이라면 알 수 없는 쓸쓸한 풍경인 것이다. 하지만 폐허가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 알 즈음이 되면, 사는 건 조금 더 깊어진다.
앤의 말처럼 앞날을 기대하고 계획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가령 삶을 '긴 여행'으로 비유한다면 여행이 꼭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더 그렇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 위험, 열차를 놓치게 될 상황,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먹고 탈이 날 가능성 같은 것은 사는 동안 언제든 나타나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 역시 그렇다. 헤어짐을 감당해내는 순간, 우리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 어차피 헤어질 테니까 대충 사랑하자가 아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니까 더 깊게 빠져 들자, 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앤의 말처럼 기대는 좋은 일이다. 실망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어느 순간, 실망을 감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시간도 도래한다. 그건 어떤 마음일까. 집에 있는데도 간절히 집에 가고 싶은 마음 같은 걸까. 자고 있는데도 더 자고 싶단 마음, 쉬고 있는데도 쉬고 싶은 마음은 아닐까. 앤의 희망찬 말은 그러므로 이렇게 읽어 마땅하다. 미래에 대한 기대의 달콤함은 쓰디씀에 대한 인정과 감당 안에서 꽃피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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