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입은행 '리스크' 뒷전..조선업종에 '여신 퍼주기'

2016. 5. 2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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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작년 선박 여신 17조6천억
대우조선 12조 넘게 차지
부실 땐 세금으로 메울 판

“선박, 플랜트 등 여신 증가로 업무발전 기반을 공고히 했다.”(2008년 진동수 행장)

“사상 최대 규모의 여신을 공급해 무역 1조달러 달성에 기여했다.”(2013년 김용환 행장)

“업무계획을 초과해 여신을 공급하는 등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2015년 이덕훈 행장)

역대 수출입은행(수은) 행장들이 내놓은 신년사 내용 중 일부다. 수출 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목적으로 설립된 수은이 내세울 수 있는 성과는 이들 기업에 여신을 얼마나 제공했느냐가 거의 전부다. 그러나 ‘실적과 위험(리스크)’은 동전의 양면처럼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갖는다.

그러나 수은은 실적 내세우기에만 치우쳐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조선업황 악화에 대한 경고음이 울리는데도 ‘선박금융’ 등을 강조하며 여신을 늘린 뒤, 부실이 드러나자 이를 메우기 위한 지원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국책은행으로서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외에 임기 안에 실적을 내려 하는 기관장들의 조급증이 어우러져 빚어진 결과다.

수출입은행의 선박부문 여신 현황

지난해 말 기준으로 수은의 선박부문 여신 규모는 17조6000억원에 이른다. 생사기로에 서 있는 대우조선해양에 대해서만 12조원이 넘는 위험노출액(익스포저)을 보유하고 있다. 이 돈이 부실채권으로 분류되면 수조원의 돈을 국민 부담으로 메워줘야 한다. 성동조선 등 중소 조선사들이 에스티엑스(STX)조선과 같은 운명에 처하면 수은의 건전성은 더욱 흔들릴 수 있다.

■ 여신만 늘리고 리스크 관리는 뒷전

수은의 지난해 기업 여신 규모는 80조원으로 2006년(28조원)에 견줘 3배 가까이 늘었다. 대출과 보증으로 이뤄진 여신 중 눈에 띄는 건 같은 기간 2배(12조원→24조원)나 증가한 보증이다. 이 가운데 11조3000억원은 현재 부실이 드러나고 있는 조선업체들에 대한 보증이다. 대부분 선수금환급보증(RG)으로 전체 선박 선수금환급보증의 절반이 수은에 몰려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선수금환급보증은 조선사가 부도 등으로 배를 만들지 못해 발주처(선주)에 인도하지 못할 경우 선주한테서 받은 선수금을 금융회사가 대신 물어주겠다는 보증계약이다. 조선사가 만든 배가 무사히 선주한테 넘어가면 수은은 온전히 수수료 수익을 챙길 수 있다. 덤으로 해외사업 금융지원 실적도 높아진다. 하지만 조선사가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면 수은이 선수금을 고스란히 물어줘야 한다. 이 계약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수은을 포함한 채권단은 해당 조선사를 쉽게 구조조정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는 신속한 구조조정에 장애물이 되거나 부실기업에 대한 지원을 되레 늘려 부실을 키우는 원인으로 꼽힌다.

수은 쪽은 “선수금환급보증을 발급하지 않으면 수주 자체가 불가능한데다 특히 시중은행이 나서지 않으려 할 때는 국책은행이 나설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항변한다.

정책금융기관 재편때
생존위해 덩치만 키워
“여신 규모는 유일한 실적”
보증 확대 방법으로
조선사에 비정상적 보증

‘정부 눈치’ 기관장 탓에
구조조정도 늦춰져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수은이 업황 전망이나 옥석을 따지지 않고 무분별하게 지원에 나서면서 조선사들의 저가 수주 경쟁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마지황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선박 공급이 계속 늘었는데, 조선업은 선박 인도까지 긴 시간이 걸리고 선박 수명도 길어 일시에 공급이 늘면 그 뒤 업황이 급격히 나빠진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수은이 2010년 이후 2조원가량의 자금을 지원한 성동조선은 지금도 회생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을 앞둔 에스티엑스조선에도 1조2000억원이 물려 있다. 수은 관계자는 “수주 산업은 10~20년 뒤의 전망이 중요한데 지금까지는 길어봐야 2년 정도를 내다보고 지원을 해왔다”며 “지금이라도 수주 산업에 대한 정보를 생산하는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시장 조기경보 시스템과 같은 제도를 수주 산업에도 도입하자는 취지다.

수출입은행의 연도별 대출 및 보증 지원 규모

■ 실적 경쟁, 정부 눈치도 원인

수은이 여신 규모를 크게 늘린 시기는 2000년대 중후반 이후다. 특히 2010년에는 전해보다 13조원의 대출을 늘렸다. 조선업황이 악화되고 성동·대선조선을 비롯해 에스티엑스와 에스피피(SPP)조선 등이 줄줄이 자율협약을 신청하면서 자금 수요가 늘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다.

그러나 당시 실적 경쟁을 벌이다 수은이 무리하게 지원을 늘린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2009년은 산업은행이 정책금융공사와 분리되는 등 정책금융기관 재편이 이뤄지던 시기다. 생존을 위해선 덩치를 키워야 했는데, 이때 칼자루를 쥔 정부에 내세울 수 있는 게 여신지원 규모다. 정책금융기관 관계자는 “대출이나 보증은 정책금융기관이 실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거의 전부”라고 말했다.

보증 확대는 손쉬운 방법의 하나로 활용됐다. 수은은 중소 조선사들이 자율협약을 신청하기 전인 2009년에 이미 사상 최대 수준으로 보증 규모(31조원)를 키웠다. 선박부문 여신 잔액도 34조8000억원(보증 31조1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이후 2~3년 동안 보증 지원 규모를 높게 유지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당시 산업은행의 해외사업 지원이 많지 않았고, 다른 은행들이 부실을 우려해 대출을 꺼리는 상황에서 수출입은행은 (그 틈을 활용해) 산업은행의 절반 수준까지 선수금환급보증 수수료(25bp=0.25%)를 낮춰 받으면서 공격적으로 여신을 늘렸다”고 설명했다. 수은 쪽은 “보증 수수료가 여신 공여 기간이나 업체 신용도에 따라 다른데, 최저 수준의 수수료를 받은 비율은 매우 적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수은의 전 고위 관계자는 “당시 보증 규모가 비정상적으로 많았고, 이후에 규모를 줄이느라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임기 안에 손실이 현실화되는 것을 피하려는 정부와 금융당국 등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한 이유다. 당장 수장부터 낙하산 논란을 일으키며 임명되는 마당에 정권 책임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구조조정에 적극 나서기는 쉽지 않다. 손상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정책금융기관들은 생존 본능에 따라 영역을 확대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위험 고객이 많아 리스크 관리 능력이 월등하지 않으면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박승헌 기자 abc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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