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했던 새누리당은 어떻게 훅 갔나

이오성 기자 입력 2016. 5. 26. 09:27 수정 2016. 5. 2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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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이렇게 무섭다. 4·13 총선 여파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질서정연하고 안정적이었던 정당 하나를 무너뜨렸다. 총선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할 주류 세력이 자기 당에 치명적인 ‘자폭 테러’를 가했고, 권력 유지에만 목을 매는 집권 여당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 결과 새누리당은 <조선일보>의 표현처럼 ‘뇌사’ 상태에 빠졌다.

친박 주류 세력이 저지른 ‘5·17 쿠데타’는 정당 민주주의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사건이다. 비상대책위가 무력화됐고, 정당 기능도 마비됐다. 어떤 절차를 거쳐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혁신위원장 내정자였던 김용태 의원은 '새누리당의 민주주의가 죽었다'라고 개탄했고, 정두언 의원은 '동네 양아치'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친박 주류 세력을 비판했다.

ⓒ연합뉴스 : 새누리당 20대 국회 당선자 워크숍 장면.

‘영원한 1당’일 것 같던 새누리당이 와해 조짐을 보이면서 정치권에서는 갖가지 시나리오가 떠돈다. 단순히 새누리당의 분당 가능성을 넘어 부산·경남(PK)을 기반으로 한 새누리당 비박계와 국민의당이 손잡을 가능성까지 점쳐진다. 사상 초유의 ‘영·호남 연합정당’ 시나리오다. 2000년대 중반 열린우리당 사태 이후 정치권이 이처럼 격랑으로 빠져든 적이 있었던가.

새누리당의 3대 강점, 지금은 어떤가

향후 정계 개편을 둘러싼 모든 관측은 섣부르다. 결국 새누리당의 운명은 이 당을 고쳐서 다시 쓰자는 구심력과 이 당으로는 안 되겠다는 원심력 가운데 어느 쪽에 힘이 쏠리느냐에 달려 있다. 정치권에서는 강력한 ‘이익집단’인 새누리당이 당을 깰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봉합’하는 쪽으로 흘러간 것이라는 전망이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만약 새누리당이 4·13 총선에서 무난한 결과를 얻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흔히 이야기되던 180석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했다면 지금 같은 아수라장은 없었을까. 물론 상황은 퍽 달라졌을 것이다.

공천 파동은 지나간 일이 되었을 테고, 김무성 대표로부터 차기 당 대표로 이어지는 권력 이양 작업도 비교적 순조로웠을 것이다. 실제로 공천 파동 당시 정치권에서는 청와대와 친박계가 총선 승리 기준을 과반 의석 확보로 낮춘 채 마음 놓고 공천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시사IN> 제445호 ‘총선 강타한 공천 파동’ 기사 참조). 자체 ‘오차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총선 결과가 새누리당 내란 사태의 근원이라는 이야기다.

ⓒ연합뉴스 : 지난 2월29일 새누리당이 페이스북 공모를 통해 마련한 ‘쓴소리’ 배경판(왼쪽). ‘한순간 훅 간다’는 문구가 화제가 되었다. 이때만 해도 새누리당이 20대 총선에서 과반 돌파는 무난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새누리당의 붕괴가 서서히 이뤄지고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새누리당이 왜 강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이미 많이 나왔던 이야기지만,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첫째, 강력한 리더십과 팔로어십이 존재했다. 당 대표를 정점으로 일사불란한 상명하복 체계가 조직적 전통이었다. 당 지도부가 선거 결과에 무한 책임을 지는 대신, 정치인들은 지도부의 방침을 적극 따랐다. 반바지 쇼를 하든, 석고대죄를 하든 잡음이 불거지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예산안 처리 이후 감자탕집 회동 때처럼 당내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친박계와 비박계가 어울려 화합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둘째, 공천 룰이 안정적이었다. 선거 때마다 공천 방식이 바뀌며 공천 불복 논란이 벌어지는 더불어민주당과 달리 지난 10여 년 동안 큰 틀에서 예측 가능한 공천 방식이 후보자 선출에 적용돼왔다. 불출마자와 낙천자에게는 공공기관장 자리 등을 보장하면서 공천 잡음도 최소화해왔다.

셋째, 당직자들의 충성도와 전문성이 남달랐다. 계파별 나눠먹기로 당직자 채용이 이루어졌던 과거의 야권과 달리 새누리당은 공채 위주의 안정적인 당직자 채용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새누리당의 이런 강점은 이번 총선 과정에서 크게 흔들렸다. 먼저 리더십과 팔로어십이 무너졌다. 겉보기에는 김무성 대표가 당의 실권자였지만 실제 ‘바지사장’이나 다름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등에 업은 친박계가 당의 방향을 좌지우지했다. 실제로 총선 기간 내내 새누리당 안에서는 '당 대표가 김무성인지 최경환인지 혼란스럽다'라고 토로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총선 한 달 전 친박계 핵심인 윤상현 의원이 김무성 대표를 지목해 '죽여버려'라고 말한 사건은 상징적이다.

공천 룰도 완전히 망가졌다. 김무성 대표가 취임하자마자 주장했던 100% 오픈 프라이머리는 물거품이 되었다. 총선을 2개월 남기고 등장한 ‘친박계 칼잡이’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전략공천 확대를 주장하며 유승민을 비롯한 비박계를 대거 학살했다. 오죽하면 ‘새누리당 살생부’ 논란의 본질이, 이한구 위원장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김무성 대표의 ‘자작극’이라는 해석까지 나왔을까. 철저한 책임을 묻지 않는 한 지난 총선의 공천 파동은 앞으로 새누리당 다수파가 선거 과정에서 써먹을 수 있는 ‘판례’로 작동할 가능성마저 있다.

충성도와 전문성이 뛰어나다는 당직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지도 꽤 되었다. 공채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여전하지만 당의 권위적인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팽배하다. 지난 2월 당직자 공채 때 면접 과정에서 황진하 당시 사무총장이 '응시자들 가운데 데모해본 사람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져 논란이 됐던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당직자들 사이에서 '지도부가 사상 검증을 하는 정당에 젊은 인재들이 모이겠느냐'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최근 정진석 원내대표가 당의 여성 당직자들과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는 권위적이고 성차별적인 당의 분위기에 대한 성토가 나왔다. 경력단절 여성 배려, 양육수당 같은 여성 친화적 정책에 대한 아쉬움도 지적됐다.

ⓒ연합뉴스 : 5월18일 지역구인 충남 공주로 내려간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여의도연구원(여연) 주변에서도 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해 말 여연은 내년 총선을 대비한 비공개 워크숍에서 ‘2016 총선 시대정신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국인들은 경제성장보다는 복지국가 및 사회 격차 해소를 더 중요한 시대정신으로 꼽고 있다’라는 것이 보고서의 골자였다. 그러나 총선 과정에서 이 보고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당 지도부는 청와대와 발맞춰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개성공단 폐쇄와 같은 이념 이슈에 매달렸다. 여연 사정을 잘 아는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싱크탱크라는 곳은 한번 물먹으면 타격이 꽤 크다. 일상적 활동은 계속되겠지만, 대선을 앞두고 전략·정책 기지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믿었던 ‘안보·경제 성장 이슈’가 안 먹히고…

새누리당의 위기를 점치는 요인은 당 바깥의 ‘근원적인 변화’에도 있다. 그동안 새누리당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었던 안보 이슈와 경제성장 이슈가 먹히지 않는 정치 지형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개성공단 폐쇄와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서 보듯 여권은 이번 총선을 안보·이념 이슈로 치르려고 했다.

그러나 총선 결과 안보 이슈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최근 어버이연합 사건이 크게 불거지면서 여권을 떠받치던 ‘안보동맹’이 크게 흔들리는 형편이다. 저성장 기조가 뚜렷해지면서 경제성장 이슈에 대한 호응도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최경환 의원이 경제부총리 시절 내놓았던 모든 성장정책(부동산 경기 부양 등)은 시장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결국 안보와 성장이라는 두 축이 흔들리면서 보수 정권의 물적 기반이 취약해졌다.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권까지, 보수 정권의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새누리당 내홍의 여파로 보수 정권 10년이 실패로 규정되면서 ‘보수의 암흑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총선 전 정치권 관계자들이 일본 자민당의 예를 들면서 ‘새누리당 장기 집권 시대’를 전망했던 것과는 180° 달라진 분위기다.

ⓒ연합뉴스 :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혁신위원장으로 내정한 김용태 의원은 5월17일 사퇴했다.

새누리당은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내년 말 대선을 앞둔 새누리당의 최대 약점은 뚜렷한 대선 주자가 없다는 점이다. 김무성·오세훈·김문수 등 유력한 주자들이 이번 총선을 거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봉합이든 분열이든, 깃발을 들고 ‘헤쳐 모여’를 외칠 간판 주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당 밖에 유승민 의원이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친박계의 반대가 격렬하다. 이렇다 보니 조심스럽게 관측되는 것이 친박계와 박근혜 대통령의 탈당 시나리오다.

친박계의 반대를 뚫고 비박계가 유승민 의원을 복당시키면서 당내 질서를 재편하려 할 경우, 오히려 친박계와 박근혜 대통령이 당을 깨고 나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다. 대구·경북을 기반으로 한 ‘박근혜 정당’의 탄생 가능성은 이미 지난해부터 여의도 정가에 떠돌았다. 친박계에서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반기문 카드’도 여전히 살아 있다.

새누리당 위기의 중심에는 친박 주류 세력과 청와대가 있다. 문제는 이들의 몽니가 ‘5·17 쿠데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차기 전당대회에서 비박계 지도부가 등장할 경우 제2차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도 높다. 일각에서는 친박계 탈당설을 흘리는 주체가 친박계 자신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언제든 당을 깰 수 있으니 까불지 마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당의 위기를 초래한 것도 친박계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도 친박계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더민주 관계자들이 요즘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새누리당의 모습이 과거 더민주와 판박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뽑은 당 대표와 비대위원장을 대놓고 흔들고, 언론 플레이를 통해 분란을 극대화하고, 실력 행사를 통해 의결기구를 무력화하는 모습이 꼭 닮았다는 것이다. 리더십과 팔로어십이 모두 무너진 정당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과거 누구도 의심치 않았던 ‘가장 강한 정당’은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김학용의원 페이스북 : 새누리당은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화합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위는 지난해 12월 감자탕집 회동.

이오성 기자 /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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