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상암] 축구가 준 상처, 축구로 잠시 잊다

홍재민 입력 2016. 5. 26. 08:04 수정 2016. 5. 26.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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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서울월드컵경기장] ‘해장술’이라고 있다. 술로 쓰린 속을 술로 다스린답시고 또 마신다. 대학생 시절, “진짜로 속이 풀린다니까”라고 말한 선배도 있었다. 솔직히 반쯤 믿었던 기억이 난다.

매달 25일 축구 잡지 편집장은 행복하다. 잡지(포포투 6월호)를 마감한 직후이니 마음이 가볍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처럼 느껴지는 월급이지만, 어쨌든 통장에 ‘체크인’하는 날이다. 사내 시스템에 접속해 비용을 정산하는 정도만 하면 된다. 마감하느라 수고했다는 구실로 오후에 슬쩍 사라져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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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6일 수요일 저녁, 서울월드컵경기장 기자석에 앉아있었다. 경기장 가는 차 안의 대화는 K리그에 관한 탄식, 한숨, 실망이 가득했다. 업계 종사자(기자)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대화 주제는 같았다. 매수, 500만 원, 계좌이체, 징계 수위, 명예훼손 등 말하기도 듣기도 싫은 단어들만 널려 있었다. 이럴 때마다 벌어지는 구단들 이기주의의 춤판은 차라리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눈앞에서는 FC서울과 우라와 레즈가 맞붙고 있었다. AFC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아시아 8강행 티켓이 걸렸으니 양쪽 모두 사력을 다한다. 최용수 감독의 굽은 어깨, 페트로비치 감독의 보행보조기(그는 허리가 아프다), 양쪽 서포터즈의 열띤 응원까지 평소 그대로였다. 하지만 경기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틀 전, 축구가 준 상처가 계속 아팠다. 통증이 가시지 않는다. 축구인들이 눈에 띌 때마다 인사하기보다 “저 사람도?”라는 의심이 앞선다. 경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데얀의 골로 서울은 합산 스코어 1-1 동점으로 따라붙었다. 연장전에 들어가자마자 아드리아노가 역전골을 터트렸다. 한 골 앞서자 서울 선수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는 우라와 선수들이 신경질을 부렸다. 서울은 계속 시간을 끌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침대축구’, 내가 하면 영리함. 하지만 리 타다나리(李忠成)가 그런 서울을 처벌했다. 2연속 골로 우라와가 합산 3-2로 앞서기 시작했다. 연장 종료 6분이 남았다. 메인스탠드 관중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연장전에 3분이 추가되었다. 고요한의 왼발 슛이 골키퍼의 손에 맞고 굴절되어 골네트가 흔들렸다. 정확히 7분 전에 있었던 원정팀 벤치의 환호가 서울 쪽으로 넘어왔다. 최용수 감독은 관중석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환호했다. 화성에 낙오되어 감자를 키우며 버티다가 지구로 생환한다는 내용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돌아가던 팬들이 기자석 옆 통로에 선 채로 환호했다. 돌아와 자리에 다시 앉은 사람들도 있었다.

“왜 또 오스마르야?”라는 불안이 적중했고, “왜 골키퍼야?”라는 의문이 구세주가 되었다. 서울은 두 번이나 죽다 살아났다. 원인불명의 끈질김과 행운. 네 번 연속으로 왼쪽으로만 뛰었던 유상훈이 처음 오른쪽으로 뛰어 5번 키커(골키퍼)의 슛을 막았다. 그다음부터 유상훈은 세 번 연속 오른쪽으로만 뛴 끝에 8번 키커를 막아냈다. 김동우가 쐐기를 박았고, 주세종이 우라와 서포터즈에게 여기가 서울이라는 사실을 복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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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후, 오스마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골키퍼가 나를 살렸다”라며 웃었다. “페널티킥 연습 좀 해라”라는 농담에 그는 “No more penalty!”라고 대답하며 또 웃었다. 고요한은 “내 축구 역사에 남을 만한”이라고 평가한 경기를 최용수 감독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경기가 너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생일 저녁 약속이 취소되었으면서 유상훈은 “그냥 집에서 쉬어야 할 것 같다. 뜻 깊은 생일인 것 같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기자회견과 선수 인터뷰까지 끝내니 밤 11시 반이었다. 쓸거리가 넘쳐 고민스러운, 아주 행복한 저녁이 되었다. 문득 마음속 불편함이 작아졌음을 깨달았다. 이번 주 K리그가 세상에 남긴 상처는 깊다. 통증이 심하다. 하지만, 이날 ‘서울극장’은 현장을 찾은 1만4천여 명의 통증을 3시간 동안이나마 잊게 해주는 마취제였다.

하프타임, 장내에서 ‘걱정말아요 그대’가 울려 퍼졌다. 관중석이 반짝거렸다. 팬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전인권의 칼칼한 목소리가 흘렀다. 팬들이 따라 불렀다. 노래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라면서 끝이 났다. 팬들이 계속 따라 불렀다.

글=홍재민, 사진=FA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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