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확장성 막는 '친노포비아'의 실체

이오성 기자 입력 2016. 5. 2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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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후에도 총성이 그치지 않는다. SNS에서, 인터넷 댓글 창에서, 여의도 술자리에서 총성은 점점 크게 들린다. 4·13 총선이 야권의 동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야권 내부의 증오와 적대는 더욱 깊어가고 있다.

국민의당 지지자는 약속대로 호남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문재인 전 대표가 정계 은퇴해야 한다고 공격하고, 더민주 지지자는 안철수 대표가 대통령이 되느니 박근혜 대통령이 연임하는 게 낫다고 치받는다. 급기야 국민의당 안철수·천정배 공동대표를 향해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7주기 행사에 오지 말라고 주장하는 더민주 지지자까지 나타났다. 국민의당이 친노 세력을 패권주의자로 몰아갔다는 이유에서다.

익숙한 싸움이니 그냥 넘어갈까? 하지만 최근 양상은 좀 달라졌다. 총선 전 야권 내전의 핵심 주체가 문재인과 안철수 지지자들이었다면 20대 총선을 거치면서 갈등 전선이 더민주 내부에서도 자리를 잡는 모양새다. 굳이 도식화하자면 또다시 문재인 대 반(反)문재인 구도다. 이 갈등 구도에서 반문재인 진영의 한 축으로 김종인·이종걸·박영선·이철희 같은 정치인이 등장한다.

ⓒ시사IN 조남진 : 보수적 경제 전문가 김종인을 영입한 것은 대권 재도전 가도에서 문재인 전 대표가 던진 승부수였다. 하지만 그런 김 대표를 거세게 공격하는 게 문재인 지지층이다.

이상한 일이다. 더민주 열혈 지지자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안철수 의원과 호남 지역 현역 의원들이 대거 탈당했음에도 갈등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지난 2월 정동영 전 장관이 결국 국민의당에 합류하자 문재인 전 대표가 '잘 됐습니다. 구도가 간명해졌습니다'라고 말한 것과는 다르다. 문 전 대표의 발언은 비단 선거 구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반노 진영의 선봉장들이 사라졌음에도 친노 대 비노 구도는 되살아났다.

갈등을 촉발한 쪽이 누구인가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갈등의 한가운데 더민주 지지자, 특히 문재인 열혈 지지자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누가 뭐래도 최대의 정치 고관여 집단이다. 진보 성향이 뚜렷하면서 정치권 사정에 밝다. 여론전에도 능하다. 일부 진보 성향 팟캐스트에서 쟁점에 불을 붙이면 이들이 SNS 공간 등에서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이슈를 이끌어왔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지난 3월 중순 정청래 의원 컷오프 사건 때부터다. 이들은 컷오프 결정 직후 곧바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박영선 의원과 이철희 전략기획본부장을 지목했다. 팟캐스트 ‘이이제이’는 컷오프 직후 박영선 의원이 이철희 본부장에게 'SNS 여론은 안 좋을 거야. 그런 데 휘둘리면 안 돼'라고 공개 행사장에서 말한 녹음파일을 공개하면서 이 발언을 근거로 정청래 의원 컷오프에 둘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연합뉴스 : 3월10일 정청래 의원 지지자들이 당사 앞에서 ‘컷오프 철회를 위한 국민 필리버스터’를 열었다.

박영선 의원과 이철희 본부장은 펄쩍 뛰었다. 박영선 의원은 오히려 자신이 정청래 의원 컷오프에 반대했다며 위 대화가 앞뒤 맥락을 자른 짜깁기라고 주장했다. 이철희 본부장 역시 총선기획단 체계상 자신은 그런 입김을 행사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글을 발표했다. 더민주 김성수 대변인은 ‘이이제이’ 측에 반론보도를 요청하는 등 강력히 반발했다.

논란은 진실게임 양상으로 흘렀지만, 위 대화 내용 이상의 후속 사실은 나오지 않았다. 한때 박영선 의원과 가까운 김기식 의원이 컷오프된 정청래 의원 지역구(서울 마포을)에 공천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지만, 결국 김종인 비대위는 정청래 의원과 가까운 손혜원 당 홍보위원장을 공천했다. 박영선·이철희 공천 개입 논란은 결국 의혹 제기 수준에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파문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각종 SNS에서는 박영선과 이철희 등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이야기가 줄을 잇는다. 정청래 컷오프 개입 의혹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둘을 ‘사쿠라’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재벌 개혁 저격수(박영선)와 차세대 더민주 간판스타(이철희)로 불리던 두 정치인은 순식간에 비호감 인사로 전락했다.

더민주 지지자들의 ‘국민의당’ 따라하기

김종인 대표에 대한 비판도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특히 더민주 일각에서 김종인 당 대표 합의추대설이 나오면서 ‘임계점’을 넘어서는 분위기다. 몇몇 팟캐스트에서 ‘김종인 특집’을 잇따라 내놓는 등 십자포화에 들어갔고, SNS 공간에서도 김종인 대표에 대한 비난 일색이다. 일부 더민주 지지자들은 김종인 대표를 거론할 때마다 ‘국보위 출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총선 전 국민의당이 김종인 대표를 비판할 때 썼던 방식을 더민주 지지자들이 따라하는 것이다.

김종인 대표가 그동안 상당한 실책을 범한 것은 사실이다. 셀프 공천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비례대표 칸막이 공천으로 당헌·당규를 어겼다는 비판을 받았다. 자신의 합의 추대 논란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노욕’이라는 비난도 자초했다. 어떤 면에서는 독재에 가까운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얼마든지 비판이 가능하다.

ⓒ연합뉴스 : 당 대표 합의추대설 이후 김종인 비대위 대표(앞줄 오른쪽)에 대한 지지자들의 비난이 증폭되었다.

문제는 김종인 대표를 공격하는 이들이 주로 문재인 열혈 지지자라는 점이다. 여기서 묘한 모순이 발생한다. 다 알다시피 김종인 대표를 삼고초려 끝에 ‘모셔온’ 건 문재인 전 대표다. 전권을 약속했고, ‘절대 신뢰’ 관계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비례대표 공천 파동 때도 문 전 대표가 김종인 대표의 자택까지 찾아가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대권 재수’를 앞두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에게 절실한 것은 ‘표의 확장력’이다. 진보 대 보수가 1대1로 맞붙은 2012년 대선 때 뼈저리게 느꼈다. 무당파를 끌어안지 못한 채 ‘범진보’의 지지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체감했다. 실제로 대표 취임 이후 그는 ‘유능한 경제정당’과 ‘튼튼한 안보’를 자신의 대표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보수 색깔이 물씬 풍기는 경제 전문가 김종인을 비대위 대표로 영입한 것은 대권 재도전 가도에서 던진 승부수였다. 문재인에게 김종인의 진짜 가치는 ‘총선 이후’부터라는 이야기다.

‘정치 고관여층’인 문재인 지지자들이 이런 맥락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이들이 김종인 공격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뭘까. 친노 인사로 분류되는 한 더민주 당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원칙과 신념의 문제다. 김종인 대표 취임 이후 우리 당에서 민주주의와 진보가 사라졌다. 총선 전부터 부글부글 끓었는데, 이제는 묵과할 수 없다.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당에게 어떤 지지자가 표를 주겠나. 문 전 대표도 지지자들의 뜻을 받아들일 거라고 본다.'

뜻밖의 반응이었다. 문 전 대표를 지지자들이 사실상 ‘견인’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런 의견에 힘이 실릴 경우 문 전 대표의 행보도 꼬일 공산이 크다. 지지층의 요구와 후보의 구상이 엇박자가 난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만약 문 전 대표가 김종인·박영선·이철희 등을 모두 포괄하는 ‘무지개 대선 캠프’를 계획한다면 지지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대구 수성갑에서 야권 승리를 일궈낸 김부겸 당선자는 최근 한 강연에 나선 뒤 봉변을 겪었다. 몇몇 언론이 '친노 세력이 당내에서 마찰을 일으켰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강연 내용을 보도했기 때문이다. 보도를 접한 이들은 분개했다. '한나라당 출신 김부겸이 친노를 씹으며 대권을 노린다'라는 유의 글이 인터넷 공간을 도배했다. 김부겸을 일컬어 ‘대구의 조경태’라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사실관계는 이랬다. 이 강연에서 김부겸 당선자는 계파 갈등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당내에서 진보적 스펙트럼에 속하는 이들 가운데 노 대통령과 함께했던 이들이 많고, 그런 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당내에서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치적 지향이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답을 했다. '친노가 당내에서 마찰을 일으켰다'라는 제목은 악의적이었다.

김부겸 당선자 측 한 인사는 '언론의 제목 장사야 그렇다 치고, 제대로 내용도 확인해보지 않고 같은 당 정치인을 조리돌림하는 일부 지지자에게 실망을 금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더민주의 또 다른 당직자는 '조금이라도 자신들을 비판하면 온갖 정치적 상상력을 동원해 상대방을 작살내는 행태에 두려움을 느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는 ‘친노포비아’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일부 열혈 친노 세력에게 공포를 느끼는 정치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더민주에서 중립지대에 속한 한 당직자는 최근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나는 친노 패권주의가 허구라고 생각했다. 19대 총선 때 한명숙 대표 측근이 대거 공천된 것 정도를 빼면 실제로 ‘이거다’ 하고 비판할 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일부 친노 세력이 일사불란하게 비주류와 김종인 대표를 융단폭격하는 것을 보며 이런 게 친노 패권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지지자들이 친노 패권주의 프레임을 공고화하는 것이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당내 비주류에게는 지난해 말 폭발적으로 늘어난 10만 당원의 존재도 ‘공포’다. 이들은 안철수 의원의 탈당 이후 더민주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당한 이들이다. 대다수가 문재인 전 대표 지지자일 것으로 보인다. 호남 당원의 탈당으로 당의 무게추가 주류 쪽에 쏠린 마당에 신규 당원들이 권리를 행사할 경우 당내 권력지형이 기울어지리라는 전망이다. '앞으로 더민주 전당대회는 친노의 독무대가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강력한 지지자에 둘러싸인 채 고립되는 ‘역설’

주류에 속하지 않은 정치인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의 선택지는 거칠게 정리하면 두 가지다. 주류를 따르거나, 당을 박차고 나오거나. 전자를 택한다면 주류의 주장에 타협하거나 침묵하게 된다. 그럴 경우 당의 외형은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표의 확장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후자의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 사석에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고 말하는 정치인도 하나둘 나오고 있다.

이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문재인 전 대표는 강력한 지지자에게 둘러싸인 채 서서히 고립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안철수를 잃고, 호남을 잃고, 당내 비주류마저 등을 돌린 뒤에도 문 전 대표에게 대권의 길이 열릴까.

손혜원 홍보위원장의 말처럼 친노는 ‘아프고 슬픈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노 전 대통령을 지키지 못한 상처를 지닌 이들끼리 뭉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특유의 배타성을 길러왔는지도 모른다. 친노 패권주의라는 정치 공격을 오랜 시간 견뎌내면서 배타성은 더욱 견고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들이 지금 야권의 최대 정파이자, 제1당의 ‘주류’라는 점이다. 역대 정치사에서 보듯 포용력을 잃은 주류는 생명력이 길지 않았다. 지지자들끼리만 열광하는 뺄셈의 정치로는 10년 만의 정권 탈환도 무망할 수 있다.

이오성 기자 /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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