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32) 정조의 화성(華城) 행차에 담긴 의미는 왕권 강화·민심 소통..다목적 국가 축제

2016. 5. 2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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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20년이 되던 시점인 1795년(정조 19년) 윤 2월 9일 새벽. 정조는 창덕궁을 출발해 화성(華城)으로 향했다. 정조가 화성을 방문하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정조는 1789년에도 자신의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水原府)가 있던 화산(花山) 아래에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이라 명명한 이후 매년 이곳을 방문했다. 하지만 1795년은 정조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1735~1815년)의 회갑이었기 때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동갑이었으니 사도세자가 살아 있었다면 함께 회갑을 맞이했을 것이다.

화성 행차의 가장 큰 목적은 어머니의 회갑연이었지만, 한 해 전 공사를 시작한 화성 축성의 상황을 점검하고 공사 참여자를 독려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다 된 시점에서 강력한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군사력을 점검한다는 성격도 강했다. 화성 행차는 결국 정조의 의지가 곳곳에 담긴 정치적 행사였다.

정조는 어머니 회갑잔치를 자신의 꿈이 펼쳐진 도시 화성에서 베풀었다. 이때 화성 행차 상황과 행사의 면모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기록으로 남았다. 당시의 주요 행사 장면은 김홍도가 주관해 그린 8폭의 ‘수원능행도’ 병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긴 후 자주 이곳을 방문해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표현했다. 이것은 정조가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정조는 화성을 오가는 길에 백성의 민원을 살피고 이를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했고 지방에 숨겨진 인재를 발탁해 관리로 등용했다. 또 수도권 방위 체제를 점검하고, 수시로 군사를 동원해 단체 훈련을 시켰다.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정조가 그동안 이룬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 신료와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해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한 조선 후기 최대의 정치적 이벤트였다.

1795년 윤 2월 9일,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의 행렬은 7박 8일간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행차의 출발을 윤 2월로 결정한 것은 농번기를 피해 백성의 부담을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었다.

행사 경비는 총 10만냥으로 모두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이었다. 환갑을 맞이한 혜경궁 홍씨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설계된 가마도 2개 제작됐다. 어머니를 위한 가마 제작에는 세심한 신경을 썼지만 정작 정조는 가마 대신 말을 타고 행차에 나섰다.

정조는 대규모 행차임을 감안해 1800여명의 행렬이 이동할 수 있는 시흥로(오늘날 1번 국도)를 새로 건설하고 안전하면서도 적은 비용으로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고안한 주교(舟橋·배다리)를 지었다. 화성 행차에서 주목받는 것은 바로 정약용이 지은 배다리였다. 배다리란 배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고 그 위에 판재를 건너질러 만드는 부교(浮橋)의 일종이다. 배다리가 놓인 지역은 현재의 한강대교, 즉 용산에서 노량진을 잇는 곳이었다. 강폭이 좁고 물살이 빠르지 않은 곳을 선택한 것이다.

배다리 건설에 필요한 배는 크기를 고려해 강 가운데에는 큰 배를 두고 점차 작은 배를 사용해 아치형으로 배다리를 쌓았다. 배다리 건설에 사용된 배의 숫자만 대략 80~90척. 경강선(京江船·조선시대 한강의 수운에 사용된 선박)의 주인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이권을 주면서 배를 동원했다. 배다리의 양편에는 난간선 240척을 잇대어 돌과 벽돌을 쌓았다.

정조의 배다리 설계는 매우 치밀하고 과학적이었으며,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도 안정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배를 동원할 때 선주들에게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 점도 돋보인다. 정조는 체계적으로 배다리를 건설해 경제적 부담도 줄이고, 잦은 화성 행차를 통해 백성의 생생한 목소리도 들었다. 정조의 효심과 과학 정신이 만들어낸 배다리 건설은 화성 행차의 또 다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배다리가 건설된 뒤, 본격적으로 정조는 화성 행차에 나섰다. 당시 행렬 모습을 담은 반차도(班次圖·지위와 임무에 따라 위치한 행렬의 모습을 그린 그림)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돼 있다.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1779명이나 현지에 미리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하면서 근무한 자를 포함하면 6000여명에 이른다. 새벽에 창덕궁을 출발한 일행은 노량진을 통해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었고, 저녁에 시흥행궁(行宮·왕이 임시로 머무르는 처소)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시흥을 출발해 이날 저녁 화성의 행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행렬이 화성 장안문을 들어갈 때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했다. 셋째 날 아침, 정조는 화성에 있는 향교 대성전(大成殿)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인근 거주자를 대상으로 문과와 무과 별시를 실시해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했다. 오후에는 봉수당(奉壽堂)에서 회갑잔치 예행 연습을 실시했다. 넷째 날에는 아침에 현륭원 참배를 했다.

남편 사망 이후 현륭원을 처음 방문한 혜경궁 홍씨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대성통곡했다. 오후에 행궁으로 돌아온 정조는 화성의 서장대에 올라 주야간 군사훈련을 직접 주관했다. 화성에 주둔시킨 5000명의 친위부대가 동원된 이날 훈련은 정조의 반대 세력에게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섯째 날은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거행됐다. 연회 장소의 좌석 배치와 가구, 의식의 진행 절차, 잔치에 참가한 여자 손님 13명과 남자 손님 69명의 명단이 소개됐다. 혜경궁 홍씨에게 올렸던 70종의 음식과 재료는 궁중음식 연구에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여섯째 날에는 화성의 곤궁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전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서울에서 정조와 같이 온 관료 15명과 화성의 노인 384명이 참가했는데 정조와 노인의 밥상에 오른 음식이 모두 같았다. 수라상이라 부르는 왕의 밥상을 노인들도 함께 받은 셈이다. 이 양로연을 끝으로 화성 행차의 공식 행사는 마무리됐다. 이후 정조는 휴식에 들어갔는데, 낮에는 화성의 축성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방화수류정을 시찰하고, 오후에는 득중정(得中亭)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였다.

다음 날은 서울로 출발하는 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묘소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고갯길에서 정조는 계속 걸음을 멈추며 부친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이후 이 고개는 지지대(遲遲臺·걸음이 더뎌지고 머뭇거리게 된다는 뜻) 고개로 불린다.

정조의 화성 행차에는 여러 뜻이 담겼다.

먼저 회갑을 맞이한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담긴 행사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이 있는 현륭원을 다녀오기 위해 대대적으로 국가 행사를 준비한 것이다. 묘소 참배와 함께 화성 행궁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성대히 베풀면서 대내외에 자신의 위상을 알렸다.

하지만 이 행차는 단순히 부모님에 대한 효심에 그친 행사는 아니었다. 왕권 과시를 위해 자신의 친위군을 중심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과거시험을 실시해 인재를 뽑고 가난한 백성에겐 쌀도 나눠줬다. 행차 도중엔 격쟁(擊錚·꽹과리를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함)과 상언(上言·왕에게 아룀)을 통해 백성의 목소리를 생생히 듣고 이를 적극 수용했다.

‘수원능행도’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왕의 행차 주위에 백성이 몰려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행렬 곳곳엔 떡장수와 엿장수가 등장해 화성 행차가 왕과 백성이 함께하는 큰 축제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정조는 세손 시절 항상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다. 늘 갑옷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었을 정도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벽파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았다. 정조가 자신과 학문, 정치를 함께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규장각을 건립한 것이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세운 것도 강력한 왕권을 갖추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화성 건설을 마무리하고 화성 행차란 큰 행사를 통해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1795년 화성 행차는 정조를 오래도록 짓눌러오던 ‘죄인의 아들’이란 굴레를 던져버리고 아울러 개혁군주의 위상을 한껏 보여준 정치적 이벤트였다. 또 그 속에는 신도시 화성을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 도시로 키우기 위한 정조의 꿈과 야망이 담겨 있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58호 (2016.05.18~05.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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