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칼한 3 쿠션 지배자.. 슴슴한 매력 만둣국男

2016. 5. 16.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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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당구인의 친구' 세계 랭킹 1위 토브욘 블롬달

[서울신문]당구붐을 일으키는 데 필요하다면 돈 한 푼 받지 않고 달려오는 ‘친구’, 세계 랭킹 1위지만 소박한 펜션에 묵어도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이모” “형님” 소리를 뉘앙스까지 살려 늘어놓는다. 우리말로 숫자를 끝도 없이 셀 수 있으며 손전화에 한글 자판을 깔아 놓을 정도로 열심이고 만둣국에 생선회까지 우리 음식을 가리지도 않는다. 제주도를 왜 이제야 찾았는지 모르겠다고 자책하며 섭지코지를 대단한 명소로 손꼽았다.

1. “이모! 형님” 한국 사람 다 됐네… 15번쯤 먹어본 만둣국이 최고

지난달 28일 입국해 서울은 물론 부산과 천안, 인천 등 당구클럽을 돌며 동호인들과 만나고 제주에서의 일주일 휴가까지 알뜰히 즐긴 ‘스리쿠션 황제’ 토브욘 블롬달(54·스웨덴)을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의 한 만둣국집에서 만났다. 한국 방문만 20회를 넘겨 정확한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는 그는 15차례 정도 먹어 본 만둣국 중에서 가장 소금기 없이 슴슴한 만둣국이었다며 배시시 웃었다.

3주 가까이, 한국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소감부터 묻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당구 선수로 활동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 그렇다고 했다. 23년째 독일 슈투트가르트 근처 바크낭에서 거주하며 매년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 해외 투어를 다니느라 안 다녀 본 나라가 거의 없는 그가 어떻게 이렇게 한국 사랑에 빠져들게 됐을까.

2. 서울 부산 천안 찍고, 제주까지… 한국 팬 사랑 고스란히 느껴져

한국의 당구 동호인들이 자신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가 온전히 느끼기 때문이다. 이번 방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팬을 떠올려 보라니까 잠시 머뭇거리더니 지난 8일 KIA와 넥센의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고척스카이돔을 찾았을 때 중계사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집에서 중계를 본 팬이 한달음에 달려와 사인해 달라고 한 일을 떠올리며 흔감해했다.

제주에서는 버스로 이동하는 블롬달 일행을 뒤늦게 알아보고 승용차로 10㎞나 추격전을 벌여 사인을 받아 간 이도 있었다. 이날 기자와 만나기 전 들른 커피숍에서 인사를 나눴다는 한 팬은 뒤늦게 종이를 구해 만둣국집으로 찾아와 사인을 받고 사진 촬영까지 함께 했다.

아버지 레나드 블롬달(77)이 당구 선수로 활동하며 클럽을 운영한 덕에 열한 살 때부터 당구를 시작해 열여덟 살이던 1983년 프로로 데뷔, 1988년부터 30년 가까이 최정상급을 놓친 적이 거의 없다. 다니엘 산체스(스페인),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프레드리크 쿠드롱(벨기에)과 함께 4대 천왕으로 통하고 있지만 경륜이나 인품으로나 가히 이들보다 한 길 위라는 평가다. 80살인 지금도 가끔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레이몽 클루망(벨기에)을 대체하는, 1인자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3. 30년 군림… 기량 껶였다지만 연륜 따라 경기 운영 무르익어

2000년대 들어 예전 같지 않다는 평을 들었지만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왔다. 블롬달은 “나이가 들면서 타점의 정확도가 떨어지고 시력도 떨어지지만 당구는 경기 운영의 묘미를 살려 극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운동 중 하나”라면서 “한편으로는 4년 전 큐대를 바꾸면서 스쿼트를 없앨 수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공을 돌렸다. 스쿼트란 빠른 스트로크로 공에 회전을 걸었을 때 회전 반대 방향으로 공이 밀려 들어가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게 없어진다는 건 그만큼 플레이어의 의도대로 공을 보낼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7년 정도 블롬달과 가까이 지내며 초청 이벤트를 주관한 당구 전문 인터넷방송 코줌코리아의 오성규(44) 대표는 공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기가 당구라고 단언했다. 블롬달 같은 최정상급 선수는 지름 61.5㎜의 공을 32개의 ‘두께’로 세분해 공을 노려 칠 수 있다. 젊었을 때 힘으로 스트로크하던 것과 달리 이제는 약간 구부러진 것 같다고 떠 보자 “하프마라톤으로 체력을 키우고 있다. 아무래도 힘은 떨어지지만 당구는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슬기롭게 극복해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운동 중 하나”라고 답했다.

일본 NHK배를 제패하던 1987년 애버리지가 1.5였는데 지금은 1.85~1.89다. 골프로 치면 5오버파를 치던 이가 5언더파를 치는 상황으로, 그만큼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고 말하면서도 지존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4. 유럽인은 즐기는 게 목적이나 한국인은 목표 명확하고 분석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맞물려 당구 인구가 급속하게 늘고 있다. PC방이 문을 닫는 대신 당구장이 곳곳에 문을 열고 있다. 이런 변화를 체감하는지 물었다. 블롬달은 “물론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벨기에에서도 붐이 다시 일고 있고 스페인과 터키, 콜롬비아와 멕시코, 베트남에서도 많은 당구클럽과 동호인들이 생겨나고 있다.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과 한국의 차이를 꼽아 달라고 하자 “유럽인들은 그저 즐기는 반면 한국인들은 누구처럼 되겠다는 목표를 뚜렷이 갖고 분석하고 토론하는 것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5. 강동궁·조재호 ‘두려운 존재’… 유명 달리한 이상천 기억나네

주목하는 한국 당구인을 꼽아 달라고 하자 강동궁과 조재호, 최성원, 허정한, 그리고 신예 김행직까지 다섯을 망설임 없이 꼽았다. 외교적 수사인지 “모두 두려운 존재”라고 했다. 오 대표는 강동궁과 조재호는 테크닉에서, 최성원은 게임 운영과 승부욕에서 남다르다고 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04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생 리’ 이상천을 기억하느냐고 하자 반가움과 숙연함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대회를 마치면 밥 먹는 자리에서도 각자 일어나 당구 발전 방안을 발표하도록 하는 등 매사에 열심이었다”고 돌아봤다.

6. 오래 활동하는 게 꿈이냐고? 난 그저 내 직업을 사랑할 뿐!

클루망처럼 오랫동안 당구를 즐기는 게 궁극의 목표냐고 물었다. 블롬달은 “그건 아니고, 내 직업을 사랑할 뿐”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당구 선수의 길을 걸었고 나란히 대회에도 나섰던 그는 유일한 롤모델로 아버지를 떠올렸지만 두 아들 야닉(20)과 헨드릭(15)에게 당구의 길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했다. “야닉에게 넌지시 얘기한 적이 있는데 똑부러지게 거절당했다. 그는 지금 연극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모든 건 아이들의 선택에 달렸다”고 답했다. 한국 당구의 발전 방안을 조언해 달라고 주문하자 “내 능력 범위를 벗어난 일”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다만 “동호인들이 진정으로 당구를 즐겨 줬으면 좋겠다. 난 여전히 배울 것이 많은 존재”란 겸손한 답이 이어졌다.

만둣국 식사와 한 시간 남짓의 인터뷰 내내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던 그가 갑자기 예민해졌다. 누군가의 맥주잔이 앞에 놓인 채로 카메라 플래시가 계속 터지자 “팬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 실망할 것”이라고 했다. 천생 프로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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