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42세 男과 15세 女의 '관계'.. 사랑인가, 성폭행인가

성유진 기자 2016. 5. 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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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심선 실형.. 파기환송심선 無罪

15세 여중생이 자신보다 27세 많은 40대 남성과 성관계를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여중생은 성폭행을 당한 것이라며 출산 직후 남성을 고소했다. 1·2심 법원은 피해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남성에게 각각 12년형·9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보낸 편지와 문자 내용 등을 근거로 '둘은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판결하며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지난해 10월 열린 파기환송심에서도 남성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검찰은 법원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법원에 사건을 재상고했고 현재 대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다.

지난달 28일 이화여대 법학관에서 이 사건에 대한 모의 법정이 열렸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파기환송심 재판을 재구성해 연 모의 법정이었다. 이 모의 법정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1심과 같은 12년형을 선고했다. 모의 법정을 기획한 한국성폭력상담소 노선이 활동가는 "모의 법정 내용은 파기환송심에서 제시된 증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며 "법원이 피해자의 시점에서 이 사건을 봤는지 아닌지가 모의 법정의 판결을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사랑인가 폭력인가

연예 기획사 대표였던 조모(47·당시 42세)씨와 중학교 3학년이던 A(20·당시 15세)양은 2011년 8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처음 만났다. A양 주장에 따르면 조씨는 "연예인 해볼 생각이 없느냐"며 A양에게 접근한 후 만난 지 4일 만에 A양을 성폭행했다. 이후로도 조씨의 집이나 차량에서 지속적인 성폭행이 이뤄졌고 이듬해 4월 A양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다. 조씨는 "임신한 사실을 집에 알리지 말고 가출하라"며 A양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고 A양은 9월 출산 후 조씨를 고소했다.

1·2심과 대법원의 판결이 엇갈린 결정적 이유는 A양이 조씨에게 보낸 서신과 문자메시지 내용 때문이었다. 2012년 5월 조씨가 다른 사건으로 구치소에 수감되자 A양은 그해 9월까지 거의 매일 구치소를 찾아갔고 100통이 넘는 서신을 조씨에게 보냈다. 편지 내용엔 '아무한테도 뛰지 않던 심장이 오빠야 옆에 있으니까 막 뛰더라고요' 같은 말들이 쓰여 있었다. A양은 재판 당시 "서신을 쓰지 않으면 조씨가 화를 냈기 때문에 억지로 작성했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A양의 접견 횟수, 서신 내용 등을 볼 때 마음에 없는 감정 표현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파기환송심 당시엔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제출되지 않았던 구치소 접견 녹취록이 공개됐지만 판결은 뒤바뀌지 않았다. 이 녹취록엔 "어제 서신 왜 안 쓰고 갔어?" "지난번에 인터넷(으로 보낸) 서신 그거 되게 성의 없어" "오늘 서신 다 쓰고 (집에) 가" 등 조씨가 A양에게 서신을 쓰도록 강요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접견 녹취록에는 조씨가 A양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어 이 녹취록만으로 조씨를 유죄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피해자 상황 고려하지 않아"

대법원과 파기환송심 판결을 두고 A양 측 법률 지원을 맡은 법무법인 온세상의 김재련 변호사는 "당시 피해자는 1년 가까이 성폭행에 시달리며 학대 순응 증후군(학대에 장기간 노출된 피해자가 순응 상태에 빠지는 것)에 시달리고 있었다"며 "늘 고함을 지르거나 화를 내던 아버지뻘 남성에게 피해자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또 당시 A양의 부모님이 둘 다 아픈 상태라 도움을 요청할 어른이 없었다는 점, 조씨가 A양의 학교와 사는 곳 등을 알고 있어 해코지를 할까 무서워했던 점 등도 법원이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여성·시민단체들은 이번 사건 판결을 두고 "앞으로 수많은 성인 가해자가 미성년자를 성폭행하고 '사랑이었다'고 주장하며 빠져나갈 여지를 열어준 것"이라고 우려했다. 성인과의 관계에서 약자이기 쉬운 미성년자 피해자의 서신과 문자 내용을 무죄 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10월에는 중학생으로 가장하고 여중생에게 접근해 수차례 성관계를 한 대학생이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당시 피해자가 보낸 '사랑해' '나 진짜 오빠 좋아했다'는 내용 등이 무죄의 증거로 채택됐다.

법무법인 소헌 천정아 변호사는 "미성년자 성폭행 피해자들은 학교나 부모님에게 알려질까봐 두려워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천 변호사는 "특히 미성년자 성폭행의 경우 교사와 여중생 사이에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예를 들어 학원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아이가 선생님을 따라갔다가 성폭행당하는 일이 벌어져도 학생이 선생님에게 호감을 표시한 문자 내용 등을 근거로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고 했다.

"의제강간 연령 높여야"

미성년자가 성폭행 피해자인 사건에 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리는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의제강간 연령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재 만 13세 미만으로 되어 있는 의제강간 연령을 만 16세 정도로 늘려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제강간이란 폭행이나 협박없는 성관계였다 하더라도 강간으로 간주해 처벌하는 것을 뜻한다. 국회에선 2012년 미성년자 의제강간죄 연령을 16세로 높이는 형법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당시 법무부와 법원은 나이를 올리면 과잉 처벌 등의 우려가 있고 청소년 성의식이 예전보다 발달했다는 이유로 반대 의견을 냈다.

의제강간 연령 상한을 주장하는 측에선 "중학생 정도의 미성년자를 성인과 같은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다"며 "실제 만 13세~16세가 성폭행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있다"고 말한다. 2014년 한국여성변호사회가 발표한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 범죄 판례 분석에 따르면 2013년 1월~2014년 6월 판결이 확정된 아동·청소년 대상 사건 중 피해자가 13세 이상 16세 미만인 사건이 전체 사건의 40.6%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의제강간 연령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스페인 정도가 우리나라처럼 만 13세 미만으로 되어 있을 뿐 독일은 만 14세, 영국은 만 16세, 미국 뉴욕·텍사스주 등은 만 17세로 의제강간 연령을 규정하고 있다. 천정아 변호사는 "그 나이대의 미성년자는 성관계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특히 상대방과 나이, 사회적 신분이나 사회 경험의 차이가 큰 경우에는 성적 행위를 거부하기 쉽지 않다"며 "법을 개정해 미성년자의 성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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