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바람난 아버지, 그래도 병수발하는 엄마.. 그 진심은 무엇일까요

2016. 5. 5.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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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다방으로 오세요]

판단력이 부족해 나쁜 결혼을 하고, 참을성이 부족해 성급한 이혼을, 기억력이 달려서 재혼을 한다던가요? 오늘의 사연은 그 나쁜 결혼의 험난한 사이클을 한 바퀴 돌아 처음의 그 사람과 다시 원점에 선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녀의 흐린 기억력을 안타까워하시겠죠. 하지만 그녀는 인생의 황혼을 맞은 여인입니다. 이미 결승점이 멀지 않습니다. 여자가 아닌 동지로 출발선에 섰고, 애정이 아닌 연민의 에너지로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나쁜 결혼이었지만 결승선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나만의 트로피를 받고 싶은 마음이라면 그녀는 정녕 어리석은 걸까요? 홍여사 드림

부모님을 생각하면 나란히 다정한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라야 할 텐데 제 머릿속에는 그런 이미지가 거의 없습니다. 엄마는 엄마 따로, 아버지는 아버지 따로 떠오를 뿐이지요. 두 분이 같은 공간에 계실 때면 거의 냉전 중이거나 불같이 다투고 계셨기에 어린 저는 그런 장면들을 애써 외면했던 모양입니다. 부모님이 서로 다투지 않을 때에도 저는 내심 불안해했습니다. 언제 무슨 말이 도화선이 되어 또 화약고가 터질지 모르니까요. 고성이 오가고, 살림살이가 날아다니는 데는 벌써 익숙해져 버렸지만 제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한 것은 '이혼'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혼이 그리 흔치도 않던 시절 그 주홍글씨 같은 단어가 우리 집의 일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저는 하느님께 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부모님은 결국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애들만 크면 이혼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엄마, 누구 마음대로 이혼이냐던 아버지셨는데 실제 상황은 그와 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아버지 쪽에서 돌연 이혼을 요구하셨습니다. 그전까지는 엄마에게 여자니까 무조건 당신이 참으라고만 하던 아버지인데, 갑자기 그 태도가 바뀌어버렸습니다. 더 늦기 전에 서로 좋게 놓아 주고 각자 갈 길을 가자고요. 오히려 당황한 건 엄마였죠. 이제 와서 누구 마음대로 이혼이냐는 소리가 이번엔 엄마한테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감춰졌던 속사정이 드러나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에게는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 일이 처음도 아니건만 아버지는 어쩌자고 굳이 이혼까지 요구한 겁니다. 엄마는 화를 내기보다 황당해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저도 딸로서 차마 하기 어려운 사정도 해봤습니다. 제발 모든 걸 정리하고 가정으로 돌아오시라고요. 그러나 아버지는 너무나도 당당하고 확고했습니다. 나한테 무슨 가정이 있느냐? 평생 잔소리에 냉대만 받았다. 누구 잘잘못을 떠나 부부관계가 깨진 지 이미 오래라고요. '잘잘못을 떠나…' 저는 그 말을 아직도 싫어합니다. 그 말은 잘못이 없는 사람이 할 말이지, 끊임없이 원인 제공을 한 쪽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잖아요.

결국 아버지의 뻔뻔한 태도와 엄마의 자존심이 맞부딪혀 두 분은 결혼 26년 만에 이혼 도장을 찍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이미 성인이었고, 두 분 사이에 무슨 희망이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이혼은 상처로 다가오더군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두 분의 행복만 생각하면 벌써 오래전에 새로운 출발을 했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를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악을 쓰며 아버지를 닦달하곤 했지만, 엄마는 불행한 결혼의 피해자입니다. 아버지는 우울한 마음과 욕구 불만을 밖에서 해소하기라도 했지만, 엄마는 오직 자식밖에 몰랐거든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아버지랑 이혼 도장 찍었다고 저한테 말씀하시던 날 엄마 표정요. 속이 다 시원하다고 말하는데, 표정은 착잡해보였습니다. 너희한테는 미안하게 됐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제는 엄마 건강 챙기고, 그동안 손해 본 몫까지 앞으로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요.

그날 이후 시간은 더 빠른 속도로 흘러갔습니다. 별사건이 없으니 한 달 한 달이 저절로 흘러가더군요. 몇 년 뒤 제가 결혼을 했고, 곧 남동생도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사를 다니고. 그렇게 십오 년의 세월이 잘도 흘렀습니다. 엄마는 이제 육십대 후반의 할머니가 되었고, 십여 년째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는 솔직히 끊다시피 하고 살았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아버지 쪽에서 저희를 피하셨죠. 제 결혼식조차 모른 척하신 뒤로는 저 역시 아버지를 찾지 않았습니다. 재혼은 안 하셨지만 혼자는 아니신 걸로 알고만 있었죠.

그런데 며칠 전 남동생에게서 기막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동생은 아버지와 간간이 연락을 하고 있었다는 것, 아버지 쪽에서 그래도 아들이라고 먼저 찾더라는 것까지는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충격이었던 건 아버지가 현재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기가 막혔던 건 우리 엄마가 자식들 몰래 아버지 병수발을 들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얼마 전 수술로 입원해 있을 때는 병원 잠을 자가며 간병했다고 합니다. 퇴원 후엔 반찬 해서 드나들며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해준다 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저는 요즘 엄마가 무슨 일로 이렇게 바쁜가 했습니다. 아들이 아는 줄을 엄마는 아직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저도 당분간은 모르는 척하라고요.

그러나 며칠을 생각하다 저는 엄마한테 솔직히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버지를 돌보는 거냐고요. 엄마는 잠시 당황하시더니, 담담히 말씀하시더군요. 다른 뜻 전혀 없고, 그냥 인간이 불쌍해서 봐주는 거라고요. 살려는 놓자는 생각일 뿐 몸만 추스르면 도로 남이라고요. 내가 끝까지 모르는 척하면 너희한테 불똥이 튈까 봐 그런다고요.

엄마 설명을 듣고 나니 제 마음이 더 복잡합니다. 동생은 벌써부터 기대를 합니다. 이참에 두 분 다시 합치셔서 서로 돌보며 잘 지내면 좋겠다고요. 엄마도 혼자 외로웠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자식들이 억지로라도 등 떠밀어줘야 한다고요. 그러나 저는 여자로서 그 말에 쉽게 동의는 못하겠습니다. 엄마가 좋다고 하면 더 바랄 나위 없는 일이겠지만, 다만 겉으로라도 선을 긋는다면 그 뜻을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 엄마는 펄쩍 뛰며 싫다고 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그 인간 송장을 치우느냐고 합니다. 저 역시 엄마의 진한 눈물을 보아온 딸로서 이제 와서 늙은 남편 수발을 들라는 말은 차마 안 나오는데… 제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걸까요? 엄마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심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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