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한옥마을이 조선시대 건물이 아니라고?
[오마이뉴스김종성 기자]
▲ 한국 최초 서양화가가 그린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춘곡 고희동 가옥. |
ⓒ 김종성 |
흔히 서울을 일컫는 '각박한 대도시'라는 말을 잠시 잊게 하는 동네다. 도시 서울이 운치 있고 다정하게 다가온다. 궁궐 옆 동네라서 그런지 한옥들이 많은데, 정다운 한옥집들 가운데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꼽히는 춘곡(春谷) 고희동(1886~1965) 선생의 화실이자 거처였던 옛 한옥집이 있다. 그의 작품이 탄생한 곳이자 당대 문화예술인들이 교류한 공간이다. 이름 앞에 지은 호가 촌스러우면서도 따스한 봄을 연상케 해 왠지 그의 집도 포근할 것 같았다.
한식과 일본식 그리고 서양식 주거문화의 특징이 고루 녹아 있는 고희동 가옥은 역사적 가치로 근대 문화유산(등록문화제 제 84호)이 되었다. 1909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에서 한국인 최초로 5년간 정규과정의 서양화 수업을 받고 돌아온 춘곡이 직접 설계해 지은 후, 40여 년 동안 살았다고 한다. 사실, 그가 살았던 오래된 가옥보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궁금한 마음에 지난 4월 27일 원서동을 찾아갔다.
일제 강점기 때 지은 개량 한옥, 북촌한옥마을
▲ 마을버스 정류장도 노인정도 모두 궁궐가 맞닿아 있는 동네, 원서동. |
ⓒ 김종성 |
▲ 한옥들이 많은 원서동은 북촌8경 가운데 북촌2경이기도 하다. |
ⓒ 김종성 |
한옥마을이다보니 당연히 조선 시대 건물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현재 북촌 일대의 한옥집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인이 경성(서울)에 이주하게 되면서 일본식 가옥을 지으며 하루가 다르게 마을풍경을 잠식해 나갈 때 나타난 사람이 '건양사'라는 건설개발회사를 운영했던 정세권 선생이다. 1930년대 지금의 북촌한옥마을을 만든 분이다.
▲ 원서동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옛 빨래터. |
ⓒ 김종성 |
그는 국민들이 비상식적인 집값으로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수익만을 좇는 요즘의 건설업체들과 다른 건설업자였다. 사업해서 번 돈은 경제 독립을 주장하는 물산장려회, 문자 독립을 희구하는 조선어학회 등 독립운동에 시멘트 붓듯 쏟아 부었다. 일제 강점기 최대 좌우 합작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의 경성지부 재무부원을 맡았다. 이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해낸 애국자가 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는 이유여서다. 혹시나 해서 북촌 곳곳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 들어가 정세권 선생의 이름을 물어보았으나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헐릴 뻔했던 고희동 가옥
▲ 근대시절 지은 고희동 가옥, 맨발로 걷는 기분이 새롭다. |
ⓒ 김종성 |
▲ 춘곡 고희동이 그림을 그렸던 화실. |
ⓒ 김종성 |
이 한옥집이 더욱 특별한 것은 1965년 춘곡이 세상을 뜬 뒤 소유주가 바뀌면서 한때 헐릴 뻔했는데, 시민들의 노력으로 문화재로 등록되면서 사라질 뻔한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2008년 종로구청이 사들여 보수공사를 한 후, 2012년 전시회 '춘곡 고희동과 친구들'이 열리면서 일반 공개가 됐다. 이제는 시민 누구나 한옥집 안으로 들어가 춘곡의 작품과 자취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이 지긋한 문화 해설사 한 분이 가옥 안에서 근무하며 춘곡의 삶과 작품들을 설명해주셨다.
구한말 역관(통역관)이자 개화 지식인이었던 고영철의 아들 고희동은 십 대 시절 프랑스 선교사가 건립한 학교에 다니면서 프랑스어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궁내부 주사로 취직해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 일을 했다. 이때 외국인들과 접촉하면서 처음 서양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관리생활을 그만두고 당대 한국화의 대가로 알려진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화단은 중국 그림을 답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에 환멸을 느낀 춘곡은 1909년 한국최초의 미술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게 된다. 일찍이 에도시대(1603~1867)에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일본 고유의 미술로 정착한 우키요에(사람들의 일상생활, 풍경, 풍물을 그려낸 풍속화로 서양의 인상파 화가에게 영감을 준다)를 떠올려보면 조선시대 자생적 미술사조가 움트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최초의 서양화가가 그린 수묵 채색화
▲ 춘곡이 유화로 그린 자화상. 오른쪽은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집의 자화상이다. |
ⓒ 고희동 가옥내 촬영. |
춘곡이 그린 단 3점의 유화 작품 가운데 현재 일본에 있다는 동경미술학교 양화과 졸업작품집에 있는 자화상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도포를 입고 큰 갓을 쓴 춘곡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양복을 입은 자화상을 올렸는데 춘곡 혼자만 그런 겉표지가 그려진 자화상을 그려 졸업작품집이 나오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식민지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예술가만의 자존심과 고집이 느껴졌다.
▲ 청자색이 느껴지는 인상적인 금강산 그림. |
ⓒ 고희동 가옥내 촬영 |
프랑스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던 중 미술유학 중이었던 백남순과 결혼, 1931년 함께 귀국한다. 이후 평안북도 정주(지금의 의주지역)에 위치한 식민지하 민족 교육의 산실 오산학교의 미술교사 겸 영어교사로 부임하게 되고 그곳에서 화가 이중섭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된다. 화가 임용련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또한 한국전쟁 때 납북돼서다.
고희동은 이 오래된 한옥 집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해방 이후에도 문화예술인과 교류하고 학생들에게 서양화를 가르치면서 휘문, 중앙고보 등에서 미술교사를 했다. 대한민국 미술협회장, 예술원장 등을 맡으며 미술 행정가를 하기도 했다. 다만, 1940년 조선남화연맹전람회에 그림을 출품해 벌어들인 판매 수익금 전액을 일제에 헌납한 일로 해방 후 비판을 받기도 했다.
춘곡 고희동 가옥, 최순우 옛집, 권진규 아틀리에 등은 등록 문화재이면서 '내셔널트러스트' 활동으로 시민문화유산이 된 좋은 사례다. 내셔널트러스트 활동이란 '지켜내고, 살리고, 이어나가기'를 모토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후원과 기증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지키고 나누는 활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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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ㅇ 교통편 : 수도권 전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ㅇ 운영시간 : 오전 10~오후 5시
ㅇ 휴관 : 월요일, 화요일
ㅇ 문의 : 02)2148-4165
ㅇ 서울시 '내손안에 서울'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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