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부끄러워요?]형·누나 '알바'해도 가족 수입 월 300만원..결국 "결혼·저축 포기"

박용필 기자 2016. 5. 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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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최저임금으로 생활비 짜보니

지난달 28일 전남공업고등학교 임동헌 교사가 노동인권 체험 시간에 ‘최저임금 밥상차리기’를 주제로 수업을 진행하며 학생들이 그린 ‘생활비 밥상’을 살펴보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자, 5명씩 조를 짜 한 식구가 되는 거야. 식구끼리 모여 각자 역할을 정하고 한 달을 살아갈 생활비를 한번 짜보자.” 지난달 28일 광주 신창동 전남공업고등학교 1학년 1반 교실에선 왁자지껄 웃음이 쏟아졌다. 이 학교 임동헌 학생부장(42)이 ‘공업 일반’ 시간을 매주 2시간씩 할애해 진행하고 있는 ‘노동인권’ 수업 시간이다. 이날 주제는 ‘최저임금 밥상 차리기’.

임 교사의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신나게 웃고 떠들며 사고 싶은 옷과 먹고 싶은 것들부터 손에 꼽기 시작했다. 일단 세금과 집세는 들어갈 것 같고, 인터넷과 게임을 하려면 통신비도 들어가야 할 테고…. 식비와 의류비는 넉넉하게 잡으면서도 공과금은 일주일 난방비도 안 나올 돈을 책정하기도 했다. 자기계발비가 너무 적어 가족당 외출을 한 달에 1~2번밖에 못할 명세서도 등장했다. 그래도 생활비는 꽤 나왔다. 634만원 정도는 준수한 편이었으며 1210만원이 나온 조도 있었다.

■노동자에게 처우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이내 잦아들었다. 두 번째 과제 때문에 골치가 아파진 것이다. 짜인 생활비 예산을 이번에는 정해진 수입에 맞춰 조정해야 했다. 문제는 수입이 최저임금이라는 것. 현재 최저임금은 시간당 6030원, 하루 8시간 노동에 주 5일 근무로 가정하고 주휴수당까지 포함하면 한 달 임금은 124만8210원이다. 아이들은 일단 일하는 사람을 늘려 나갔다. 아빠는 물론 엄마도 일을 나가고, 그래도 감당이 안되자 대학생 아들이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고, 고등학생 딸도 패스트푸드점에 나간다. 하지만 부모님 맞벌이로는 250여만원,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는 60여만원, 아직 생활비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자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멋진 옷과 군것질을 포기하고, 저축을 그만두고 보험을 해약하고, 차를 팔고 집세가 싼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래도 금액이 안 맞춰지자 애완동물을 팔고, 자녀까지 입양보내는 조도 나왔다.

곧이어 내려진 선생님의 냉정한 평가. “저축을 줄이면 미래에 대비할 수 없고, 늙어서도 일을 해야 한다” “결혼을 포기해야 하고 아이도 못 갖는다” “의료비를 줄이면 수명이 줄어들고 교육비를 줄이면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설명에 시끌벅적하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선생님은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처우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만이 아닌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라며 수업을 마쳤다.

박상영군(17)은 “커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잘 키우고 싶고 저축도 하고 싶은데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며 두렵다고 했다. 정민서군(17) 역시 수업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TV에서 몇몇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그들에게 고용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일하는 사람에 대한 처우가 왜 중요한지 되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권리찾기’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이 수업은 학생들에게 노동자의 권리가 왜 중요한지를 쉽게 일깨우기 위해 만들어진 체험학습이다. 수업을 진행한 임 교사는 ‘최저임금 밥상 차리기’를 포함해 ‘모의 단체교섭’이나 ‘노동법 연극’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인권 수업을 매주 1~2차례 정기적으로 진행해왔다. 2003년부터 시작해 벌써 14년째다.

취업 담당 교사였던 2002년, 플라즈마 용접장에 현장실습을 나간 제자가 제대로 된 방진마스크도 없이 일을 하던 모습에 충격을 받아 노동인권 교육을 시작하게 됐다. 임 교사는 “취업 담당 교사인데도 근로기준법을 몰라 업체 사장에게 항의조차 제대로 못했던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이후 노동 관계법 등을 공부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루한 법 교육에 아이들이 흥미를 보이지 않자 아이들과 직접 상황극 동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노동이 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지, 노동자의 권리가 왜 중요한지를 아이들에게 제대로 납득시키기는 생각보다 어렵다”며 “어려서부터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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