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하청 소장 "월급도 퇴직금도 못 받고 나앉았다"

2016. 5. 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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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한 통하고 잠적한 사장..집·자동차 타인 명의 돌려 배신감" 직원들과 회사 인수해보려고 시도했지만 수포 "이제 뭘 할지 막막하기만"

"전화 한 통하고 잠적한 사장…집·자동차 타인 명의 돌려 배신감"

직원들과 회사 인수해보려고 시도했지만 수포 "이제 뭘 할지 막막하기만"

(창원=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사장은 잠적해버렸고 원청업체는 협조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직원들을 불러놓고 '미안합니다. 회사문을 닫아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통보했습니다."

더 이상 회사가 존립할 수 없는 처지이니 뿔뿔이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그 말을 사장 대신 전달해야 했던 A(37)씨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직장을 떠난 지 20일이 훌쩍 지났으나 월급도 퇴직금도 못 받은 채 거리로 내몰려야해 허탈해하고 분노하던 직원들 얼굴은 아직 잊지 못한다.

경남지역 중형조선소 사내협력업체에서 10년간 근무한 A 씨는 회사 내에서 사장 바로 아래 직급까지 승진했다.

처음에는 선박 배관을 설치하는 기사로 입사해 현장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다.

나중에는 실력을 인정받아 대리, 과장, 차장을 차례대로 거친 뒤 2013년 작업을 총괄하는 소장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조선업이 휘청거리면서 위기가 왔다. 원청으로부터 받는 일거리가 점점 줄어들면서 결국 그의 회사는 지난 4월 8일 도산했다.

회사를 살리려는 노력도 해봤다. 길게는 10년간 함께 동고동락한 동료들을 쉽게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장은 소장이었던 그에게 전화 한 통을 걸어 '더는 못하겠다'고 일방적 통보를 한 뒤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고 그 길로 잠적했다.

그는 대출을 받아 회사를 인수한 뒤 원청에 부탁해 계속 협력업체로 남으려고 했다.

작은 회사라 인수 자금은 5천만원 정도면 충분했다. 그를 믿고 따르던 직원들도 '함께 남아 일하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원청업체 측에서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탁을 들어주기 힘들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그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그때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습니다. 오랜 세월 함께 일해온 동료들을 이렇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어요. 내가 직업을 잃는 것보다 한가족처럼 지내온 동료들과 헤어진다는 게 더 두려웠습니다."

A씨와 직원 35명은 한 달치 월급과 퇴직금 3억7천만원을 받지 못한 채 길거리로 쫓겨나야 했다.

이들 중 '기술'이 있는 사람은 다른 협력업체로 재취업했다. 하지만 그곳의 문화나 일하는 방식에 동화되지 못한 채 제 발로 그만두고 나온 이도 꽤 많다.

사무직 등 나머지 직원들은 아직 갈 곳을 찾지 못했다.

전화 한 통만 한 뒤 회사를 떠나버린 사장에겐 섭섭한 마음이 컸으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업 전체가 위기인 상황인데다 회사가 도산하기 전에도 '힘들다'며 사업을 접자고 그에게 의견을 구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최근 함께 일하던 직원으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사장이 퇴직금과 한 달치 월급을 주지 않자 노동청에 고발했는데, 노동청에서는 사장 앞으로 재산이 한 푼도 없어서 받기 어렵겠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사장이 사는 집, 자신이 타고 다니는 차 등 모든 재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돌려놓은 게 틀림없었다.

업계가 호황이던 시기 사장은 원청으로부터 월 2억5천만원까지 공사 대금을 받았다.

직원 임금, 각종 운영비 등을 제하면 못해도 월 5천만원은 사장이 챙겼다는 게 A씨 생각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 앞으로 땡전 한 푼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직원들 사이에서 사장이 재산을 압류당해 퇴직금과 월급을 지급하는 게 싫어 미리 선수쳤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다른 사람이 사장을 욕할 때도 최대한 그의 입장을 이해해보려 애썼던 A씨도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배신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직원들은 '사장이 그랜저에서 제네시스로 차를 바꿀 여력은 있고 직원 퇴직금 챙겨줄 여유는 없느냐'며 수군거렸습니다. 윗사람은 돈을 챙기고 아랫사람은 희생해야 하는 이런 구조는 사실 대다수 협력업체의 현실입니다. 정직한 사장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극소수예요."

민사소송도 생각해 봤으니 비용만 많이 들고 재판은 길어질 게 뻔해 포기했다.

이 밖에도 의뭉스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협력업체에는 '선급금'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장이 원청으로부터 매달 지급받는 대금을 한 달 먼저 받는 것이다.

문제는 이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사장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퇴직금을 지급받지 못한 이유도 여기 있었다. 사장이 대금 1억6천만원을 먼저 받아내고 회사문을 닫은 것이다.

이 대금으로 퇴직금과 월급을 정산하려 한 직원들로서는 황당할 노릇이었다.

가장으로서 아내와 함께 두 남매를 키우던 A 씨도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몇 년 전 조선업이 호황일 때만 해도 풍족하지는 않아도 먹고살 만은 했어요. 월 500만원씩 받으며 가족을 부양하고, 빚을 내긴 했지만 아파트도 한 채 마련했으니까요. 직원들도 나름 고급 숙련공으로 분류돼 꽤 많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대신 두 아이를 깨워 학교에 보낸 뒤 아내와 함께 주변 산책을 하는 등 소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낙천적인 아내는 처음 회사가 문을 닫았다는 말에 '회사가 망한 걸 어떻게 하겠느냐.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 생각해라'라고 그를 토닥여줬다.

그러나 최근엔 지나가는 말처럼 '내가 나가서 식당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읊조리는 일이 부쩍 늘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A씨는 미안한 마음에 아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처음에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죠. 아내와 영화도 보고, 좋아하는 낚시도 실컷 하면서 앞으로 뭘 할까 곱씹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통장 잔고가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불안감이 엄습하더라고요."

업계에서 평판도 좋고 소장 경력까지 쌓은 그는 남들에 비해 재취업이 어렵지는 않은 편이다.

현장에는 아직 일거리가 남은 곳이 있고, 조선업이 어려워지면서 이 바닥을 떠나 다른 업계로 뛰어드는 사람도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 소개를 받아 다른 협력업체에 들어가 일을 할 생각도 했으나 '그래 봤자 그곳도 조만간 망할 텐데'라는 생각에 그마저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퇴직하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아버지에게 손을 벌려 생활비에 보탰다.

"애정을 가지고 해왔던 일이지만 다시 조선업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습니다. 냉정하게 조선업계 전망은 더 나빠지면 나빠지지 좋아질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내부적으로도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많이 지친 것도 사실이고요"

A 씨의 얼굴엔 그늘이 짙게 깔렸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간 점이 가장 큰 듯했다.

"이제 어디서 새 출발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home12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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