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일간의 세계여행] 98. '사서 고생'..하루 40km 걷기 쯤이야
-까미노 데 산티아고 +27:포르토마린에서 멜리데까지 40.1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어제 힘들다고 하소연하던 독일인 순례자는 일어나자마자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짊어지더니 씻지도 먹지도 않고 그 길로 길을 떠난다. 다른 순례자들도 하나 둘 나갈 채비를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케이와 나는 미리 사놓은 빵과 주스를 챙겨 식당으로 간다. 아침을 준비해서 먹는 사람은 시끌벅적한 스페인 세 모녀와 우리뿐이다. 다른 순례자들은 걷다가 마주치는 마을의 바에서 데사유노를 먹을 것이다.
마당에 빨아놓은 신발을 깜빡 잊고 도미토리에 들여놓지 않았더니 밤새 비가 내렸는지 신발이 다시 젖었다. 마음이 편하니 이런 실수를 한다. 어쩔 수 없이 축축한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선다.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다.
알베르게 밖으로 나와 보니 수량도 많은데다 비가 와서 안개가 드리운 포르토마린(Portomarin)의 아침 풍경이 묘하게 아름답다. 친절하게도 걸음마다 까미노 화살표가 예쁘게 표시된 보도블록을 걸어 포르토마린을 떠난다. 마을 중심에서 내려와 다시 다리를 건너야 까미노로 접어든다. 오늘은 다른 알베르게에서 묵은 순례자들 몇 명이 먼저 걷는 모습이 보인다. 확실히 순례자가 많아졌다.
산티아고에서 100km 떨어진 사리아를 지나고부터는 순례자들을 많이 만난다. 걷기 힘들 것 같이 심하게 살찐 소년을 격려하며 함께 걷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스페인 세 모녀처럼 서너 명이 한 그룹으로 걷는 사람도 있다. 어제는 만나지 못했던 아일랜드 여자도 동행을 구해 발걸음을 맞추고 있다. 많은 사람의 배낭을 바라보며 걷는 것은 처음이어서 신기하기도 하지만, 여태까지 고요한 까미노를 걸어와서인지 이 길을 공유하는 사람이 많은 게 편하지는 않다. 많이 비우고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부끄럽게도 아직 이런 욕심이 남아 있다.
비는 내리지 않아 걷기에는 적합한 날씨다. 남은 거리가 두 자리만이 표시된 이정표가 어색하면서도, 산티아고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얼굴에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만일 바가 문을 열었다면 다음 마을에서 따뜻한 까페콘레체 한 잔을 마셔야겠다. 마을에 바가 없을 수도 있고, 있다 해도 문을 열었을지 장담하지 못하면서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상상하는 마음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이 길이, 이 숲이 지구 바깥의 새로운 공간인 것처럼 걸어왔다. 산 너머에 하루를 쉴 수 있는 침대와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만족하는 일상이다.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실현하고 있으니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고속전철을 타고 스페인까지 와서 물집을 치료하고 무릎에 붕대를 감고 기어이 한 달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사서 고생”을 할까?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편리해진 삶 속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이 길에 섰을까? 까미노 위에서 만난 그 누구도 선뜻 “왜 걷는가”에 대해 명확히 대답하지 못한다. 그것은 “왜 이 길을 걷는가”라는 질문이 “왜 사는가”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시작은 내 의지가 아니었고 까미노는 나의 선택이라는 차이점이 있겠지만, 그 위에 선 이상 걸어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산티아고에 근접하고 있다는 생각하니 모든 길들이, 젖은 길이거나 아스팔트를 걷던 기억조차 추억이 되겠구나 싶다. 발걸음을 내딛으면 전진하게 되고 언젠가는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는 자명한 사실을 몸으로 터득하게 해 준 길이다. “산티아고”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 몇 년 전 어느 날, 이미 나는 까미노에 한걸음을 디딘 것인지도 모른다.
빨라스데레이(Palas de Rei)에 도착한다. 제법 큰 마을이다. 단체로 순례길을 걷는 학생들이 지나간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걸어서 이동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 친구와 선생님과 함께 걷는 순례자 경험은 그야말로 “수학여행”의 추억으로 오래 남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곳에서 멈추기로 해서 시청 근처의 알베르게를 찾아갔는데,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근처의 다른 한 곳도 공사 중이다. 어느 건물 앞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25km 정도 걸었으니 걸음을 멈추려고 했는데 알베르게를 찾지 못하니 생각이 많아진다. 다음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까지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이제는 걷는 것이 피로하기는 해도 아픈 일은 아니기 때문에 갈 데까지 가보기로 한다. 다음의 큰 마을인 멜리데(Melide)까지 가려면 원하지 않았던 15km를 더 가야 한다. 시간은 많이 남아있고 아직 지치지도 않아서 오늘은 예정에 없던 40km를 걸어보기로 한다. 최근 4~5일간은 계속 짧게 이동해서 컨디션도 괜찮다. 압박붕대를 다시 감고 신발끈을 조인다.
덤으로 걷게 되는 길이라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어디서 보게 되든지 노란 화살표는 마음을 위로해 준다. 적응이 돼서 40km를 걷는다 해도 전처럼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힘들지만 발걸음까지 무거워지지는 않는다. 555km가 아니라 55.5km가 남았다는 표지석을 만나는 것도 감격스럽다. 산티아고까지의 거리가 현저히 줄어드는 걸 확인하며 걷는 재미가 오늘의 피로도를 줄여준다. 하늘이 하늘로 이어지듯이 길은 길로 이어진다. 이상한 소유욕이지만, 내딛기만 하면 그 길은 나의 길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예상보다 15km를 더 걷고 있어도 아직 괜찮다.
까미노를 걷기로 결심했을 때, 한 가지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걷는 그대로 사진을 찍어보자는 것이었다. 수많은 길이 있고 그 길을 걸어도 사람마다 마음으로 들어오는 프레임은 다를 테니 나만의 프레임을 담아보자는 것이었다. 까미노에 들어선 이래 멈추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며 왔다. 산티아고로 근접하는 마음의 흔들림을 카메라도 아는지, 오늘따라 사진이 자꾸만 흔들린다.
멜리데에 진입하고도 한참을 걸어 시립알베르게에 도착한다. 갈리시아 지방에서 묵었던 알베르게 중에서 시설은 최고다. 순례자도 많아져서 빈 침대가 별로 없다. 이곳 역시 갈리시아의 다른 알베르게처럼 주방은 있는데 그릇이 없어서 순례자들은 거의 요리를 하지 못하고 외식하는 분위기다. 요리 도구도 없고 그릇이라고는 작은 냄비 한 개와 접시 몇 개뿐이다.
정리하고 알베르게 바깥에 나가 본다. 주변이 번화가라 호텔, 레스토랑, 순례자 병원, 성당들이 모여 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도 많아진다.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델페레그리노를 먹을까, 유명하다는 뿔보(Pulpo : 문어)요리를 먹어볼까 고민하며 마을을 둘러본다. 마침 냉동 해산물만을 전문으로 파는 가게가 몇 개 눈에 띈다. 이제 것 지나온 마을에서는 볼 수 없던 해산물 가게를 둘러보다 보니, 하나의 냄비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떠오른다. 그램 단위로 파는 냉동 해산물과 채소, 그리고 생면을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온다.
점심을 먹지 않으니까 걷고 난 후 저녁식사는 더욱 중요한 일과가 된다. 주방에 단 하나인 냄비에 국물을 만들어 해물과 채소, 생면을 넣고 끓이니 해물칼국수 비슷한 시원한 맛이 난다. 연일 비가 오고 흐려서 국물요리를 먹고 싶었는데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더니, 역시 궁하니깐 통한다. 식당 안의 다른 순례자들은 와인이나 맥주만 사 와서 마시는 중인데 요리를 해 먹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신기해한다. 스페인 사람이 다 된 듯, 천천히 음식을 먹고 느긋하게 맥주를 마시며 늦도록 이야기를 한다. 40km를 걷는 일은 여전히 힘들지만 단련된 몸은 이 정도의 피로는 수용하게 되었다.
까미노에서의 스물일곱 번째 해가 진다. 이제야 까미노에서의 하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저기 50km 전방 어딘가에 산티아고가 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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