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억 빼돌리기' 1분이면 충분했다
부산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이모 씨(56·여)는 급전이 필요해지자 사채업자 오모 씨(50)에게 돈을 빌리려 했다. 오 씨는 “명의만 빌려주면 담보 없이 5000만 원을 빌려주겠다”고 뿌리치기 힘든 제안을 해왔다. 이때만 해도 큰 범죄에 휘말릴 줄 몰랐던 이 씨는 오 씨의 지시대로 증권계좌를 만들고 선불폰도 개통했다. 이로써 이 씨는 대출사기의 공범이 됐다.
지난해 11월 10일. 이 씨는 오 씨로부터 받은 범행 초기 자금 1억5000만 원을 증권계좌에 넣고 이를 담보로 C저축은행에서 주식담보대출 3억 원을 빌렸다. 이 4억5000만 원에 대해서는 곧바로 마음대로 돈을 빼낼 수 없도록 질권(質權)이 설정됐다. 이 씨는 이어 오 씨의 지시대로 D저축은행에서 대환대출을 받기 위해 대출중개업체 직원과 여러 차례 전화로 상담했다. 대환대출이란 기존 대출금을 갚는 조건으로 새로 대출을 받는 상품이다.
11월 18일 경남 통영시의 한 펜션. 이 씨는 상담을 받았던 대출중개업체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대출금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씨 뒤에서는 부산 칠성파 김모 씨(39) 등 조직폭력배 3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의 팔뚝엔 문신이 가득했다. 그 옆에서는 자칭 주식전문가 최모 씨와 전 펀드매니저 김모 씨가 노트북 두 대를 이용해 이 씨 명의의 증권계좌 잔액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대출중개업체 상담 직원의 OK 사인을 받은 D저축은행이 이 씨의 계좌에 대환대출금 3억 원을 입금한 순간 ‘작전’이 시작됐다. 일당은 대환대출을 할 때 저축은행이 돈을 입금한 뒤 대출중개업체가 질권을 새로 설정하기까지 약 1분이 걸린다는 점을 범행에 악용했다. 최 씨는 3억 원이 들어오자마자 대출중개업체 직원의 원격 조종을 받는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 전원을 껐다. 곧이어 원격 조종을 받지 않아 ‘자유로운’ 다른 노트북을 이용해 대환대출금 3억 원을 대포통장(실사용자와 명의자가 다른 통장)으로 옮겼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분. 최 씨 일당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주범인 최 씨와 전 펀드매니저 김 씨는 2년 전 인터넷 주식투자 카페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지난해 초 함께 작전주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이들은 대출 사기(詐欺)를 계획했다. 최 씨의 사촌인 조폭 김 씨까지 가세했다.
이들은 한 번에 만족하지 않았다. 두 번째부터는 대환대출금뿐 아니라 최초 대출을 받기 위해 담보로 제공한 주식까지 처분해 대포통장으로 빼돌렸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3차례에 걸쳐 12억 원을 가로챘다. 이들은 대포통장에서 돈을 찾지 못할 것에 대비해 가로챈 돈을 마카오 환전조직에 보내 세탁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완전 범죄를 꿈꿨던 이들은 대출중개업체의 신고로 수사에 착수한 경찰에 의해 덜미를 잡혔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범행에 쓰인 계좌와 통신내역 등을 추적한 끝에 최 씨 일당 14명을 검거해 최 씨와 펀드매니저 출신 김 씨, 조폭 김 씨, 사채업자 오 씨 등 8명을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고 28일 밝혔다. 명의를 빌려준 이 씨 등 3명과 단순 가담자 3명은 불구속 입건했다.
김호경 기자 whalefish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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