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숙제 '죽었으되 살아 있는 레닌'

2016. 4. 2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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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2일이면 ‘146살’이다. 그는 영원히 썩지 않은 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잠들어 있다. 러시아는 1924년 이후 내내 붉은 광장을 지키고 있는 소련의 ‘상징’ 레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이 사망한 지 92년이 되는 지난 1월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가과학자문위원회 위원들과 만났다. 푸틴은 이 자리에서 유리관에 누워 있는 레닌을 끄집어냈다. 그는 이례적으로 레닌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을 정면으로 문제삼으며 레닌에 대한 ‘본심’을 드러냈다. “(과거에도) 각 지역에 자치권을 줘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그들이 러시아라고 불리는 건물 아래에 나중에 터질 원자폭탄을 설치했다. 우리는 글로벌 혁명은 필요하지 않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분리주의는 꿈도 꾸지 말라는 공개적 경고를 하면서 레닌의 ‘소련’이 이상에 불과했음을 비판한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은 “푸틴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격분했다.

레닌의 91주기를 이틀 앞둔 지난해 1월 19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레닌 묘(마브졸레이 레니나)에 젊은 행위예술가들이 ‘성수’를 뿌리고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치다 경찰에 체포됐다. 이들이 이름 붙인 행위예술의 제목은 ‘엑소시스트: 마브졸레이의 신성모독’이었다. 이들 중 두 사람은 러시아의 독립언론 <그라니>에 “러시아에서 소련의 과거를 지우려는 시도였다”고 말했다. 이들의 행동은 15일 구금짜리 ‘풍기문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레닌을 둘러싼 러시아의 해묵은 논쟁은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위치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가 레닌의 묘. / 러시아 tvc방송

혁명은 끝났으며 소련은 무너졌다. 그러나 레닌은 아직 살아 있다. 오는 22일이면 ‘146살’이다. 그는 영원히 썩지 않은 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잠들어 있다. 러시아는 1924년 이후 내내 붉은 광장을 지키고 있는 소련의 ‘상징’ 레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는 매년 4월이면 러시아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떠올리게 하는 숙제다.

2011년 집권당 통합러시아당이 ‘굿바이 레닌’ 웹사이트를 만들어 레닌의 시신을 매장하는 데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을 때 70%가 찬성표를 던졌지만 격한 논쟁만 남기고 성사되지 못했다. 러시아 언론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가 지난 1월 레닌 92주기를 앞두고 실시한 온라인 여론조사를 보면 조사에 응한 8465명 중 5257명(62%)이 매장에 찬성했다. 그러자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은 푸틴 대통령이 “사회를 분열시킬 수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하는 문제에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해부학자 등 5~6명 시신 보존 전담팀

러시아 출생 사회인류학자 세르게이 유르차크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지난해 5월 버클리 뉴스에 “레닌의 시신은 소련 공산주의 통치가 자리를 잡는 데 ‘닻’과 같은 역할을 했고, 소련이 무너진 후에도 레닌의 시신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어 가까운 미래에는 매장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러시아 정치인들과 과학자들이 한 세기 가까이 레닌의 시신을 새것처럼 보존하며 어떻게 ‘동맹’을 맺어왔는지 들여다보는 책을 쓰고 있다. 내년 출간 예정이다.

레닌의 시신을 보존하는 임무는 1924년 이후 줄곧 러시아생화학연구교수센터가 맡고 있다. 해부학자, 생화학자 등 전문가 5~6명으로 이뤄진 핵심 전담팀이 있었다. 이들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인 베트남의 호찌민과 북한의 김일성 부자의 시신 보존을 돕기도 했다. 러시아가 만들어낸 독자적 보존기술은 시신의 원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일반적인 방부처리와는 다르다. 외양, 무게, 색깔, 탄력 등 시신의 물리적 형태를 살아 있는 듯 보존하기 위해 피부와 살 일부를 플라스틱과 다른 합성물질로 교체했다.

레닌 묘 안에 방부처리돼 안치돼 있는 레닌의 시신. / RIA노보스티

푸틴, 통치에 적절히 활용하며 줄타기

레닌의 눈에는 얼굴 표정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인조 속눈썹이 붙여져 있다. 피부는 산 사람의 것처럼 보이게 특수염료를 썼고, 색깔필터를 씌운 작은 등이 레닌의 시신을 비추고 있다. 레닌의 얼굴, 팔과 몸통에는 형태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합성물질이 주입돼 있다. 액화지방보다 모양이 잘 잡히고 주사로 주입할 수 있도록 과학자들이 파라핀, 글리세린 등을 섞어 만든 것이다. 유르차크 교수는 “레닌의 시신은 1년 반마다 두 달에 걸쳐 검사와 확인 등 대수술을 받고 재방부처리된다”고 전했다. 전담팀은 레닌의 품위 유지를 위해 3년마다 새 수트를 갈아입힌다.

1924년 레닌이 죽었을 때 당시 소련의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레닌의 시신을 영구보존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한 달 반 동안 10만명이 넘는 참배객이 찾아올 정도로 레닌 추모열기는 대단했다. 소련 지도부는 당초 일시적으로 레닌의 시신을 참배객에 공개한 뒤 붉은 광장에 묘를 만들어 매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때문에 두 달이 넘도록 참배객이 몰려들어도 레닌의 시신상태는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이를 본 정치인들은 시신을 좀 더 오래 보존하는 방안을 생각하게 됐다.

소련이 무너진 후 러시아의 첫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레닌 묘를 폐쇄하고 레닌의 시신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묘지에 있는 그의 어머니 마리야 율랴노바 옆에 옮기려 했다. 그러나 시기상조였다.

러시아 공산당 당수 겐나디 주가노프(가운데) 등 공산당 소속 의원들이 레닌의 탄생일인 2014년 4월 22일 헌화하기 위해 레닌 묘를 찾고 있다. / 러시아투데이(RT) 방송

레닌 묘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방점은 ‘현상유지’에 찍혀 있다. 물론 공산당과는 다른 이유다. 푸틴은 레닌을 통치에 적절히 활용하며 줄타기를 하고 있다. 레닌의 사회주의 공동체 구상과 푸틴의 국가주의의 본질이 다를지언정 과거 영광을 만든 영웅으로서 레닌은 강력한 러시아의 부활을 주창하는 푸틴이 꺼내 쓰기 좋은 소재다. 또 시장자본주의에서 소외됐다고 여기는 이들을 끌어안기에 레닌만큼 적절한 인물이 없다.

지난 13일 러시아 정부 조달청은 레닌의 시신을 보존하는 데 올 한 해 예산이 1300만 루블(약 2억300만원)이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발표가 나자 여론은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한 러시아 독자는 이 소식을 전한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에 “공산당은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다면 레닌을 복제라도 하려고 할 것”이라며 냉소하는 글을 남겼다. 또 다른 독자는 “레닌은 스스로 우상으로 취급되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러시아의 우파 야당인 ‘옳은 일’의 당수 안드레이 두나예프는 몇 년 전 레닌 시신 보존비용을 두고 “차라리 그를 다시 살려내는 게 더 싸게 들 것”이라고 냉소하기도 했다.

레닌이 언제쯤 생전의 바람대로 어머니 곁으로 가 안식을 찾을지는 점치기 어렵다. 아마도 러시아 사회가 레닌과 소련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담담히 내놓을 수 있을 때여야 할 것이다. 세대가 바뀌고 혁명과 소련을 경험한 이들이 점차 줄어들면서 레닌에 대한 향수는 점차 옅어지고 있다. 러시아 일간 <코메르상트>가 2013년 1월 내놓은 여론조사에 따르면 소련의 붕괴를 아쉬워하느냐는 질문에 49%가 ‘그렇다’고 답해 1992년 이후 처음으로 과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보도했다.

<이인숙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ook9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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