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당구 개척자' 故 김경률, 그 후 1년 "그는 죽은 게 아닙니다"
출전 선수들과 심판은 가슴에 고인을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달고 경기에 나섰다. 다른 대회와 달리 멋진 샷이 성공해도 요란한 환호성이나 세리머니보다는 정제된 박수만이 경기장에 조용하게 울렸다.
한국 3쿠션 당구를 대표했던 김경률은 2015년 2월 22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에서 떨어져 숨을 거뒀다. 명절에 앞서 어머니의 아파트에 왔다가 시설물을 고치는 과정에서 실족해 그만 추락하고 말았다. 다음 날이 그의 35번째 생일이라 더욱 주위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날 대회 결승에서는 서현민(충남당구연맹)이 오성옥(서울연맹)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우승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대회는 기량을 겨루는 것보다는 당구인들이 고인을 추억하고 그의 열정과 개척 정신을 이어받는 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재호(서울연맹), 강동궁(동양기계) 등 톱랭커들은 대회에 나서지 않았다. 김경률의 동갑내기 친구들인 둘을 비롯해 생전 고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동료, 후배들이 이번 대회를 만들었다. 대한당구연맹이 주최자로 나섰지만 실제로는 후원 정도였고 실질적으로 대회를 주관한 것은 선수들이었다.
이들은 대회 출전 대신 지난 12일부터 열린 예선전 심판으로 나섰다. 조재호 추모위원장은 "우리가 만든 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다투는 것보다는 심판을 보는 게 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었다"면서 "경쟁보다는 다른 선수나 동호인들까지 당구인들이 함께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추모 대회로 김경률은 살아 있을 것"
결승이 끝난 뒤에는 고인에 대한 추모식이 진행됐다. 생전 고인의 경기 모습과 인터뷰를 담은 동영상이 나오자 아버지 김호남 씨(66)와 아내 김윤정 씨(37) 등 유족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국 당구의 보석은 조재호, 강동궁 등 다른 선수가 하면 되고, 나는 머슴 역할을 하겠다"는 고인의 인터뷰가 나올 때는 박수향, 김민아(이상 대구연맹) 등 동료 선수들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날 추도식은 절친 강동궁이 사회를 봤고, 조재호가 추도사를 읽었다. 이에 앞서 장영철 연맹 회장의 추도사에 아버지 김 씨가 답사를 했다. 조재호는 추도사에서 "평소 고인은 항상 쾌활했고, 언제나 한국 당구의 발전을 생각했다"면서 "그의 낙천적인 성격처럼 밝고 건강하게 한국 당구를 키워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오늘은 슬픈 날이 아니라 즐거운 날"이라고 역설했다.
추도식 뒤 아버지 김 씨는 "아들을 잊지 않고 추모 대회를 열어주신 선수들과 연맹이 정말 고맙다"면서 또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비록 경률이는 먼저 하늘나라로 갔지만 죽은 게 아니다"면서 "추모 대회를 통해 아들은 살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내 김 씨는 "남편을 위한 대회를 열어주신 관계자 분들께 정말 감사하다"면서도 "아이들 때문에 1년이 정신 없이 지나갔다"고 돌아봤다. 남편의 빈자리가 저릿하게 느껴지는 대목.
약 30분 간 진행된 추도식이 마무리될 무렵 곱게 드레스를 차려 입은 첫 딸 연우(3)는 지루한지 "너무 심심해"라며 엄마에게 떼를 쓰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아직 아빠의 죽음을 실감하기 어려운 나이. 추도식 기념 촬영을 마친 직후 건네진 과자에 겨우 투정을 멈췄다.
▲"개척 정신 계승 위해 매년 대회 개최"
추도식 뒤 조 위원장은 "경률이는 한국 당구의 개척자였다"고 고인을 돌아봤다. 지난 2003년 처음 고인을 알게 된 조재호는 김경률 때문에 해외 진출의 꿈을 현실로 이룰 수 있었단다. 그뿐 아니라 최성원(부산연맹), 강동궁 등 최근 한국 선수들이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게 김경률이 뚫어놓은 길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국 선수들의 쾌거가 이어졌다. 그의 절친 선배 최성원이 2012년 역시 터키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2014년 한국인 최초 세계선수권대회 우승과 세계 랭킹 1위, 세계캐롬당구연맹 올해의 선수상까지 휩쓸었다. 강동궁도 2013년 수원 월드컵과 지난해 역대 최고 상금 대회인 LG U+ 마스터스를 제패했다.
조 위원장은 "경률이도 처음에는 선배들과 함께 국제대회에 나섰는데 어느 순간 영어도 못 하는데 혼자서 다니더라"면서 "그런 좌충우돌의 경험이 쌓여 나중에는 한국 선수들의 국제대회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 선수들을 보고 '얘는 좀 쉽고, 쟤는 어렵다' 이렇게 전력 분석까지 해줬다"면서 "그런 도움이 있었기에 국제대회 성적이 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이제 남은 것은 고인의 유지를 이어받는 일. 조 위원장은 "경률이는 생전 '당구 선수들이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면서 "또 우승을 한 뒤 기자들에게 꼭 태극기가 나오도록 찍어달라고 하는 등 한국 당구의 자부심이 컸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당구의 위상과 권리를 높이기 위해 매년 대회를 여는 등 고인의 살아 있는 정신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추모대회 시상식과 추도식이 마무리된 뒤 고인의 아내 김 씨는 시아버지와 함께 연우(3)의 고사리 손을 잡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김 씨의 친정 어머니가 막내 딸 연아(1)를 업은 채 뒤따랐다. 경기장 벽면에는 '당신을 기억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고인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CBS노컷뉴스 임종률 기자] airjr@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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