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오전 열 시, 그녀를 위로한 건 '여자'들의 수다

백영옥·소설가 입력 2016. 2. 13. 03:03 수정 2016. 2. 2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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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품 그 도시] 틈 - 서울 어느 동네의 찜질방

4년 만에 드디어 네 번째 장편소설이 나왔다. 이번 소설에 '드디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건 4년 만이라서가 아니라 출간 예정이었던 책이 봄에서 여름, 가을, 겨울로 미루어지더니 해를 넘긴 탓이 컸다. '나올 거다'가 '나온다'에서 '나오겠지'로 바뀌는 과정 중에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출판계 불황이나 한국 문학의 위기 이외에 잡지가 폐간되거나 회사가 전면적 구조 개편을 단행한 탓에 조직 밖으로 튕겨 나온 선후배들의 소식이 줄을 이었다. "선배, 출판사 등록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한밤중에 잡지사 후배의 전화를 받아도 딱히 답이 없는 나는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사는 세상에는 오해와 불통, 고통이 어찌나 넘쳐나던지 연애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희망'이라든가 '기쁨' 같은 말은 점점 쓰기가 힘들었다. 오랜만에 신간 출간 관련 인터뷰를 하러 광화문의 한 신문사에 가는 길에 습관처럼 지하철 안을 둘러봤는데, 책을 읽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제 아주 보통의 풍경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보고 싶었던 친구들을 여럿 만났다. 교보문고에서 소설을 사 들고 온 친구가 이번 책이 어떤 내용이냐고 물었다. 신문사 인터뷰에선 상처의 공동체로 묶인 여자들의 이야기라고 대답했었다. 짝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들어갔다가 이미 남자의 외도를 눈치챈 그 남자의 아내의 슬픔에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말이다. 이번 소설의 제목인 '애인의 애인에게'의 뜻은 1부의 몇 장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애인'이 아니라 '애인의 애인에게' 스웨터를 '대신' 떠주고 나오는 여자의 이야기에 수긍하려면 사랑의 기쁨이 아니라 강렬한 빛 때문에 생기는 그림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부연 설명까지 덧붙였었다. 그런데 친구에겐 "이번 소설은 그냥 망한 사람들 이야기야"라고 말해버렸다. 실없는 농담 같지만 솔직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상식은 적어도 이랬다. 한쪽이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끝난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은 쪽의 이야기는 늘 내 마음을 잡아끌었다.

사실 세상의 많은 일은 '그냥' 일어난다. 삼시 세끼 건강식을 먹고 매일 달리기를 해도 느닷없이 암에 걸리고, 24시간 쉬지 않고 일해도 갑작스레 해고를 당하며, 10년을 사귀었던 연인과 예고 없이 결별하기도 한다. 세상의 많은 일은 인과관계로 말끔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쓰던 2014년 세월호에 탑승해 구조되지 못한 아이들의 마지막을 자주 생각했었다. 상상만으로도 지옥 같았다. 희망으로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시절을 산다는 건 어떤 일일까. 사랑을 사랑 이외의 것으로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의 맨 앞에는 어떤 단어들이 놓여야 하는 걸까. 진짜 빛을 보기 위해서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국 절망으로 희망을 말하는 법을 찾아내기 위해 1840장이라는 긴 소설의 초고를 써야 했다. 1000장 이상을 줄여 출간하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쓴 초고 중 가장 길었다. 광화문에서 인터뷰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온 그날 밤 서유미의 소설 '틈'을 읽었다. 소설의 첫 장면. 누군가의 엄마로 사는 데 익숙해진 주인공이 성실했던 남편의 외도 현장을 막 목격한 후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잊기 위해 빵집에 간다. 여자는 갓 구운 식빵을 결대로 찢어 하염없이 먹으며 불행을 밀어내면서 먹는 행위와 감각에 집중한다.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담담히 설명해내는 데 실패한다. 기가 차고 억장이 무너져 언어는 분쇄된다. 기막힌 심정은 울거나 부수며 내지르는 악다구니 혹은 두서없이 반복되는 잔소리로 당장 폄훼된다. 그러므로 갓 구운 파이 껍질처럼 마음이 부서지기 쉬울 땐 스스로의 몸에 보호 장치를 만들어줘야 한다. 공기와 바람이 가득 든 봉투 안에 자신을 넣어둘 수 있어야 한다.

"평소 같으면 '저 여자는 왜 이런 얘기를 털어놓나. 우리는 그다지 친하지 않고 나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란히 앉아 얘기를 듣는 동안 흡연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민규 엄마를 보는 것과 민규 엄마에게 담배 피우는 얘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 생각했다."

찜질방 흡연실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는 같은 아파트 여자를 목격한 후 주인공은 어쩌다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담배 피우는 사람을 싫어하지만 그녀가 담배를 피우게 된 사연을 들으면서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게 된 것이다. 열한 시 무렵의 찜질방, 세 명의 동네 여자가 그렇게 서로를 '발견'해낸다.

"윤서 엄마가 승진이 된 뒤 민규 엄마는 임정희가 되고 여자는 정윤주가 되었다. 쑥스러워하며 이름을 말하고 난 뒤 바로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았지만 누구 엄마라는 호칭은 떼어냈다. (…) 세 사람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식혜와 미숫가루, 식초를 희석시킨 물을 마셨다. 같은 아파트에 살긴 하지만 서로가 알지 못하는 길을 통해 이곳에 도착했고 다른 지점을 향해 걸어가던 중이었다. (…) 중년 여자들의 오전 열 시 무렵은 술꾼들의 새벽 같았다."

남편의 불륜을 목격한 여자가 '엄마'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되찾는 일. 엄마와 아내로 기능 하며 살았던 여자들이 모여 아이 교육과 돈에 관련된 대화 없이, 겸손이나 걱정을 가장한 자랑이나 은근한 과시 없이, 뭘 좋아하고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에 대해 말하게 된 계기는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다. '애들 간식은 뭘 해주나, 저녁엔 무얼 해 먹나'라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야 없겠지만 이제 돈을 벌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고민의 종류를 바꿔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나 자신을 떠올렸다.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 내 옆에도 늘 여자들이 있었다. 왜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이었을까. 돌이켜보니 그것은 유독 여자들에게 요구되거나 강요된 선택들 때문이었다. 이때의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걸 감당해내는 일이라 언뜻 부당해 보일 수도 있는 고통과 희생이 내재된다. 가정과 직장, 육아와 승진의 기로에 놓여 끝없이 자기 정체성을 엄마에서 아내, 아내에서 며느리, 며느리에서 직장인으로 바꾸는 동안 생겨난 성숙함과 유연함이 내게 깊은 통찰과 위로를 준 것이다. 투박하고 거칠어도 그런 여자들의 말에는 늘 놀라운 힘과 위안이 있었다.

책을 다 읽고 이 작품의 배경이 어디인지 작가에게 직접 물었다. 그녀가 사는 동네 근처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상처받은 여자가 대낮에 갈 수 있는 서울 어느 동네의 찜질방'이라는 긴 답변이 날아왔다. 아! 그렇구나. 갑자기 서울 어딘가의 찜질방에 누워 식혜와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책 읽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찜질방이라고 해도 나는 그러고 싶었다.

●틈―서유미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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