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퇴직' 수단으로 전락한 은행권 임금피크제

박기주 2016. 2. 1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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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최정희·박기주 기자] A은행에 근무하고 있는 김모(58) 부장은 최근 고민에 빠졌다. 지난해 노사가 정년연장에 합의하면서 퇴직 걱정을 덜었다 생각했는데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연봉이 기존의 40%나 깎일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최대한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자는 게 A씨의 지론이었지만, 희망퇴직금을 받는 것이 금전적으로는 유리할 것 같아 퇴직을 생각하고 있다.

B은행에 근무했던 이모(56)씨는 지난해 말 짐을 쌌다. 직원 관리를 맡았던 그는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으면서 현장 관리직으로 업무가 변경됐다. 업무범위가 불분명해 젊은 직원과 마찰이 생기는 경우도 잦아지면서 자존감이 낮아진 이 씨는 결국 은행 문을 박차고 나왔다.

주요 시중은행이 본격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김씨나 이씨 같은 은행원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임금 삭감과 고용 연장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들은 대부분 희망퇴직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피크제가 희망퇴직의 창구로 전락하면서 50대 중후반 중고령 근로자들의 고용안정이 위협받고 있는 셈이다.

◇ 짭짤한 ‘퇴직금’에 짐 싸는 은행원

11일 은행권에 따르면 지난해 NH농협은행의 임금피크제 대상인원 290명 전원은 임금피크제를 적용받기보다는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KEB하나은행도 지난해 임금피크제 대상 인원 237명 가운데 1명만 남고, 나머지는 회사를 떠났다.

다른 은행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신한은행은 전체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 140명(전체 190명 중 성적 우수자 50명 제외) 중 120여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임금피크제 대상 400명 중 60%가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고용 연장을 원하고 있고, 정부에서도 고용을 늘리기 위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지만 취지와 다르게 희망퇴직자만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임금피크제 적용에 따른 급여 감소폭이 너무 커 앞으로 받게 될 임금보다 희망퇴직금이 큰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 신한은행의 경우 임금피크제를 적용받게 되면 첫해엔 직전 급여의 70%를 받고 이듬해부터는 60%, 50% 순으로 급여가 적어진다. 반면 희망퇴직금은 24~37개월치 임금으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은 이들이 받는 임금과 비슷하거나 많다.

임금피크제가 퇴직창구로 전락한 것은 저금리로 수익성이 악화된 상황에서 주요 은행들이 급여 등 관리비를 줄이려는 의도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비용을 털고 나면 그 뒤로는 추가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국민은행도 희망퇴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비용이 급증했지만 그로 인해 인력구조가 개선되고 생산성이 향상된 만큼 3~4년에 걸쳐 비용을 회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국민은행의 경우 지난해 5년만에 희망퇴직을 실시, 1293명이 퇴직하면서 3891억원의 비용이 소요된 바 있다.

실제 은행들이 아예 임금피크제 대상자를 희망퇴직으로 유도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국민은행은 지난해부터 임금피크제 대상자를 상대로 희망퇴직을 정례화하기로 했다. 우리· 신한은행도 매년 55세 이상의 직원들이 임금피크제 또는 희망퇴직을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 임금피크제에도 ‘성과급제’ 도입..대안될까

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임금피크제가 임금을 덜 받더라도 고용기간을 늘리는 본래의 취지에 맞게 운용되려면 성과가 우수한 직원에 대해선 이를 유예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단 지적이 나온다.

신한은행의 경우 지난해 ‘차등형 임금피크제’를 실시해 임금피크제 대상자 140여명 중 35% 정도인 50명이 우수 등급을 받아 임금피크제 적용 없이 현직에서 기존 연봉을 받고 정년을 보장받았다.

윤석헌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는 “신한은행처럼 임금피크제에 성과급을 도입하는 방법을 고려할만하다”며 “금융권 시니어들은 인적 네트워크나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임금피크제라는 획일적인 잣대로 재단하는 건 은행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인터넷 은행의 출현, 저금리 기조 등으로 은행 수익성이 낮아지는데 반해 인건비가 많이 들다보니 이런 부분이 희망퇴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며 “해외진출, 자산운용 강화 등을 통해 수익을 내고 경쟁력을 갖춰야만 희망퇴직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주 (kjpark85@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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