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오늘만 굶으면 '김치볶음밥' 먹을 수 있어요"

류재현 입력 2016. 2. 11. 09:07 수정 2016. 2. 1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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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먹기 싫어요, 안 먹을래요."

여느 집처럼,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같나요?
아닙니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바쁜 저녁 시간, 식당 구석에 앉아 허겁지겁 김밥을 먹는 한 초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12살 박 모 어린이는 맞벌이 가정의 아이입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2년 전 대구시가 주는 급식카드를 발급받았고, 주로 저녁을 사 먹을 때 이 카드를 이용해 왔습니다.

어린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못 챙겨준 어머니는, 아동급식카드 제도가 고마울 따름입니다. 한 끼 사 먹기에는 빠듯한 4천 원이지만, 대구시의 도움 덕분에 박 군이 저녁을 거르지 않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급식카드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일부러 목걸이까지 만들어 챙겨줬습니다.

하지만 누가 알까요? 박 군은 이따금 저녁을 거르고 있었습니다. 북적대는 식당에서 달랑 김밥 한 줄만 시켜놓고 혼자 밥 먹는 시간이 초등학생에게 고역이었던 겁니다. 게다가 무료급식을 지원받는다는 사실을 반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습니다. 그래서 박 군은 종종 주변 눈치를 보며 배를 채우기보다, 굶는 쪽을 선택하는 겁니다.

■ "오늘만 굶으면, '김치볶음밥' 먹을 수 있어요."

박 군이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주로 찾는 곳은 동네 하나뿐인 김밥집입니다. 여러 가지 메뉴가 있는 곳이지만 박 군에게 허락된 메뉴는 3천5백 원짜리 김밥이 전부입니다.

'김치볶음밥 5천5백 원, 갈치조림 6천 원..'

김밥이 물린 박 군은, 먹고 싶은 음식을 사 먹으려고 일부러 굶기도 합니다. 하루에 쓸 수 있는 4천 원은 다음 날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틀 치 밥값을 모아서 다른 메뉴를 사 먹으려는 겁니다. 하지만 카드를 사흘 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돈이 소멸되기 때문에, 어떤 날은 아까운 4천 원을 그냥 날리기도 합니다.

■ 급식카드를 받아 주는 식당은 어디에?

그런데 박 군은 왜 매번 같은 김밥집만 찾는 걸까요? 드물긴 하지만, 주위에는 4천 원으로도 김밥이 아닌 다른 메뉴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있긴 한데 말이죠.

이유는 바로, 아무 식당에서나 급식카드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자체와 사전에 협의가 된 식당, 즉 가맹점에서만 급식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가맹점 수가 턱없이 부족해서, 인구가 8만 명인 대구시 중구의 경우 가맹점이 12곳밖에 되지 않습니다. 카드는 발급했지만, 가맹점 확보는 뒷전이었던 거죠.

■ 아동급식카드 충전액 20%는 못 사 먹고 '소멸'

지난해 대구의 아동급식카드는 아이들이 사용하지 않아 없어져 버린 금액이 무려 20%, 15억 원이나 됩니다. 박 군과 같이, 김밥 외 가격이 맞는 메뉴가 없거나 또 카드를 받아주는 식당이 몇 곳 되지 않는다면 이 수치는 전국에 별반 차이가 없을 겁니다.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 광역시도가 여전히 한 끼 식사비로 4천 원을 지원하고 있고, 경북과 울산은 그나마 지원되는 한 끼가 4천 원도 되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아동급식카드를 관리하는 보건복지부는 급식카드 미사용액이 얼마나 되는 지조차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미사용액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문제 의식도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을 내서 운영하는 주체가 각 지자체이기 때문에 미 사용금액 관리도 각 지자체의 소관이라는 겁니다.

■ 밥 때문에 가슴에 멍드는 일은 없어야

<아동복지법 시행령 제36조 제1항>"보건복지부장관, 시·도지사 및 시장·군수·구청장은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수급자나 「한부모가족지원법」에 따른 보호대상자인 아동 등 저소득층에 해당하는 아동 중에서 결식 우려가 있는 아동을 대상으로 급식지원을 하여야 한다."

아동 급식 지원은 법에 규정된 정부와 지자체의 역할입니다. 이 법 덕분에 밥을 굶는 많은 아이가 어떤 형태로든 급식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자체의 역할은 단순히 지원에서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아이들이 밥을 잘 먹고 있는지, 무엇을 먹는지 등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합니다. 소멸해서 되돌아오는 급식비가 20%나 된다면 왜 사용되지 않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거죠.

급식카드를 발급받고도 사용 안 하는 아이들을 탓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어른들의 '무책임'이 더 커 보입니다. 현실물가를 제대로 반영한 활용도 높은 급식카드가 하루빨리 나와서 박 군처럼 가슴에 멍드는 아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밥 때문에 눈치 본다면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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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현기자 (ja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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