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상만 보던 엄홍길 "이제 산 아래 인간이 보여요"
영화 '히말라야' 볼 때마다 감동 달라…정치보다 약속이 먼저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홍국기 기자 = "산악회 모임이 매주 금요일마다 있었어요. 1990년대 중반까지 모임 끝나고 이거 먹으러 정말 자주 왔죠. 높은 산에서도 많이 키우고, 구하기도 제일 쉬운 육류가 바로 닭이에요. 소·돼지는 안 먹어도 닭 안 먹는 종교는 없잖아요."
본격적인 설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5일 서울 종로5가 신진시장에 있는 닭한마리집에서 산악인 엄홍길(56) 대장을 만났다. 그를 만난 식당은 영화 '히말라야'에 세 차례 등장하는 곳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그는 "벌써 군침이 도네"라며 "산악인들도 기자들처럼 소맥(소주와 맥주를 섞은 술)을 마신다"고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러면서 첫 잔의 술을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으로 몇 차례 튕겨 덜어냈다. 우리나라의 '고수레'(민간 신앙에서 귀신에게 먼저 바친다는 뜻으로 음식을 조금 떼어 던지는 일)처럼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라고 그는 설명했다.
엄 대장은 이날 술자리에서 자신의 건배사로 유명한 "히말라야, 기!"를 연방 외쳤다.
그는 지난해 12월 16일 개봉해 최근까지 775만여명의 관객을 모은 '히말라야'를 모두 여섯 차례나 관람했다.
영화는 에베레스트(초모랑마) 정상에 오른 뒤 하산 길에 숨진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엄 대장이 '휴먼원정대'를 꾸려 등반에 나선 11년 전 실화를 각색했다.
산악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을 향한 '등정'이 아닌 사람을 향한 '등반'에 나서는 이야기가 뜨겁고 깊은 울림을 준다. 숨진 대원의 시신 운구가 목적인 등반은 세계 최초였다. 기록도, 명예도, 보상도 없는 일이었다.
"장례식장 장면과 죽은 무택이를 발견한 장면에서 계속 눈물이 났어요. 가슴이 먹먹했죠. 영화를 볼 때마다 감동이 달라요. 11년이 다 돼가는데 한두 달 전에 다녀온 것 같이 당시 상황이 너무 생생해요."
엄 대장은 자신을 연기한 배우 황정민에 대해 "나를 연기하려고 무진장 신경을 많이 썼더라"며 "연구를 많이 한 흔적이 역력했다"고 평가했다.
엄 대장은 당시 공기가 무척 건조하고 가쁜 호흡으로 찬 공기를 계속 들이켜 거친 쇳소리가 나던 자신의 목소리를 황정민이 그대로 연기한 점이 인상깊었다고 했다. 황정민은 촬영 현장에서 3일 내내 소리를 질러 일부러 쉰 목소리를 만드는 연기 투혼을 발휘했다.
'히말라야'는 2005년 방영된 TV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엄 대장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나서 수많은 영화 제작 제의를 받았으나 고사했다. 유가족과 자신의 눈가에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아서였다.
그러다 2012년 JK필름의 윤제균 감독이 직접 찾아와 자신을 설득하면서 고심 끝에 영화화에 동의했다.
"경쟁사회로 치달으면서 사회가 너무 각박해지고 주변에 끔찍한 사건·사고도 많이 일어나잖아요.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인간애가 실종된 요즘 사회에 이런 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마음을 바꿨어요. 인간애와 동료애, 희생정신과 공동체 생활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인 것 같아서요."
세상은 그를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천m 이상 16좌(봉우리)를 등정한 산악인으로 기억하지만, 그의 등반사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38번의 도전 끝에 20번 완등, 18번의 실패를 맛봤다. 그 사이 후배 대원 6명과 짐꾼이자 안내자 역할을 하는 셰르파 4명을 잃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는 어느 순간 산 정상이 아닌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산만 보며 정상만을 생각했다가 언제부턴가 산 아래가 보이는 거예요. 사람이 보이는 거야, 인간이 보인 거지."
엄 대장이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원정대를 구성할 때, 또 재단과 네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에 '휴먼'이라는 이름을 넣은 이유다.
그는 2008년 설립한 엄홍길휴먼재단을 통해 네팔 어린이에게 학교 열여섯 개를 지어주는 '휴먼 스쿨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히말라야 산맥을 오를 때 불굴의 도전정신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가겠다는 취지에서다. 현재 열세 번째 학교가 착공에 들어갔으며, 오는 22일 열한 번째 학교 준공식이 열린다.
"네팔 어린이들이 자라는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제가 잘 알죠. 이들이 교육으로 깨우쳐야지 바뀌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을 때 그 기쁨과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엄 대장은 최근 새누리당으로부터 4·13 총선 비례대표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정치 입문 계획을 묻는 말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제가 히말라야에 네팔 어린이를 위한 학교 열여섯 개를 세우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지금은 정치할 때가 아니죠. 제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있으니까요. 제 꿈을 이루게 해준 히말라야에 제가 받은 것을 우선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요."
pseudojm@yna.co.kr, redfla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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