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할머니는 왜 산책로를 파괴했나

김민호 입력 2016. 2. 9. 03:22 수정 2016. 2. 1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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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퀴찬가<19> 등산객과 자전거, 공존을 꿈꾸다

산악자전거 길에 장애물 설치한 주민

결국 체포돼 3년간 보호관찰 판결 받아

산길 두고 한국서도 다툼 씨앗 보여

공존 위해 MTB가 먼저 등산객 배려를

캐나다 노스밴쿠버에 거주하는 티네케 크랄(64)씨가 자전거 산책로에 통나무 등 장애물을 설치하는 모습이 녹화된 범죄행위 증거물. 캐나다 공영방송 CBC 홈페이지 캡처.

지난달 21일 캐나다 노스 밴쿠버 지역에서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순넷 할머니가 산길에 장애물을 설치한 혐의로 재판에서 처벌을 받은 것이죠. 할머니는 지난해 1월 범행현장을 빠져 나오다 경찰에 체포됐는데요. 이어진 조사에서 티네케 크랄(Tineke Kraal)씨가 지난 2년간 매일 2시간씩 통나무와 나뭇가지를 오솔길 곳곳에 뿌려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캐나다 공영방송 CBC가 ‘산책로를 파괴(sabotage)했다’고 보도할 정도로 집요한 행동이었죠. 할머니는 대체 왜 그런 일을 했던 걸까요?

●할머니의 일탈, 산악자전거를 겨냥하다

크랄씨는 산악자전거(MTB)의 통행을 막으려 한 것이라고 털어놨습니다. CBC에 따르면 그는 “MTB 운전자들이 산길을 망치니까 속도를 늦추려 했을 뿐”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실제로 사건이 터진 프롬산(Mt. Fromme)의 오솔길은 MTB동호인이 개척하고 관리해 온 길이었고요.

크랄씨 체포도 지역 MTB동호인이 직접 나섰기에 가능했습니다. 장애물에 자전거가 걸려 넘어질 것을 두려워한 동호인 두 사람이 적외선 카메라를 산길에 숨긴 겁니다. 마침내 범행 장면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고, 법정에서 증거로 제시된 영상에는 크랄씨가 새벽녘 어둠 속에서 통나무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습니다. 검찰이 “MTB이용자가 입을 뻔한 충격은 비극적 수준”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죠.

위는 사건이 발생한 '로워 스컬' MTB 산책로 입구. 아래는 범행 증거를 촬영해 체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적외선 카메라. MTBR.COM과 CBC 캡처

결국 할머니는 법의 처벌을 받게 됐습니다. 판사는 남을 해칠 의도가 있었다는 검찰의 주장은 거부했지만 공공기물 파손 혐의가 인정됐죠. 지난달 21일 열린 재판에서 크랄씨는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지만 3년간 보호관찰을 당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15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도 떨어졌고요. 세계 MTB동호인이 모여드는 MTBR 등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직접 길을 보수하게 하라”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나돌고 있습니다.

●한국도 안전지대는 아냐

한국에서도 MTB 위협 의혹이 종종 제기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동호인이 자주 찾는 산길에 통나무가 굴러다닌다거나, 자전거를 타려고 야산에 오솔길을 냈더니 어느 날 나무막대가 깊이 박혀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이따금 올라옵니다. 올해 9월에는 누군가 군용전화선을 나무 사이에 묶는 것을 직접 봤고, 실제로 전화선을 해체했다며 조심하라는 경고까지 나왔습니다. ▶네이버 카페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해당 게시물 링크( http://goo.gl/XMqm8q(http://goo.gl/XMqm8q) )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혹이 공공기관의 검증을 받아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군용전화선 관련 경고글 역시 취재가 시작된 이달 5일부터 기사가 출고된 9일 현재까지 기간 사이에 삭제됐습니다. 아직까지는 등산객과 MTB의 갈등이 물리적 충돌을 부를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2년간 경기도 내 숲길을 관리해 온 전성호 주무관은 “자전거 인구가 늘면서 갈등도 많아지는 추세지만 등산객의 민원이 크게 늘어난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은 안전하다”고 단언하지는 못해도, MTB를 겨냥해 땅에 못을 파묻거나 탑승자 목 높이에 철사를 설치한 사례까지 보고되는 해외와는 분명 상황이 달라 보입니다.

해외에선 한국보다 훨씬 심한 MTB 위협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스페인 지역지 '라 보즈 데 갈리시아' 등 인터넷 캡처

●MTB가 먼저 등산객 배려해야

“공존의 열쇠는 MTB동호인이 쥐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고개를 갸웃하는 동호인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에서 MTB는 소수이고, 가만히 있어도 손가락질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지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소수이기 때문에 MTB동호인이 먼저 등산객을 배려해야 합니다. “MTB 역시 산의 이용자이니 받아들여라.” “MTB가 산에 미치는 영향은 수많은 등산객의 무게에 비하면 미미하다.” 이렇게 MTB 입장만 고집할 순 없습니다. 등산객 중에 산에서 MTB를 만나는 경험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바퀴 끌리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고, 그러다 보니 등산객 입에선 곧잘 험한 소리가 나옵니다. 도로에서 자동차가 아무리 천천히 달려도 자전거에게는 위협적인 것처럼 산에서는 MTB가 등산객에게 두려운 존재입니다. 여기에 “지나갈게요” 한마디만 외치고, 달려오던 그대로 등산객을 지나치는 일부 MTB동호인의 행동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잠시 멈춰 서서 등산객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다툴 일도 없는데 말이죠.

미국의 유명 산악자전거 권익 옹호 단체인 IMBA가 실시한 자전거 전용 산길 개척, 관리 활동 장면.

산길에 장애물이 나뒹구는 데 대한 책임이 MTB동호인에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백 번 양보해서 모든 MTB동호인이 불친절하다고 가정해도 MTB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죠. 다만 등산객들이 MTB와 함께 다녀도 안전하다고 느낄 때, 일부의 탈선을 용인하거나 부추기는 문화가 사라질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MTB 탄생 초기에는 종주국 미국에서도 산길이 폐쇄되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의 산길이 닫히기 시작하자 지역 동호회들이 MTB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에 나섰죠. 현재는 미국 전역에 수백 개의 지부와 동호회를 거느린 국제산악자전거협회(IMBA)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이 한창 공존을 위해 싸우던 시절 만든 ‘산길의 규칙’은 28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상황에도 꼭 맞습니다.

“다른 산길 이용자들에게 당신이 온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노력하세요. 친절한 인사말이나 벨도 좋습니다. 자전거 전용 산길이 아니라면, 자전거는 꼭 다른 산길 이용자들에게 길을 양보하세요. 모든 길을 안전한 곳으로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김민호기자 kimon87@hankookilbo.com(mailto:kimon8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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