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蘭香과 人香

선우정 논설위원 입력 2016. 2. 3. 03:03 수정 2016. 2. 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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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세 나라는 난초를 '군자(君子)의 상징'으로 여긴다. 공자 덕분이다. 공자는 '깊은 수풀에서 자라지만 사람이 없더라도 향기를 풍기는 난초'를 절개를 잃지 않는 군자에 비유했다. 군자의 교분을 난에 비유한 어록도 남겼다. '둘이 한마음이면 날카로움이 쇠를 자르고 향기는 난초와 같다.' 사자성어 '금란지교(金蘭之交)'가 여기서 유래했다.

▶일제강점기 묵란(墨蘭)은 믿음의 표상이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동지에게 난을 친 부채를 전하면서 '난이증교(蘭以證交)'라는 글귀를 썼다. '난초로 교류의 증표를 삼는다'는 뜻이다. 30여 년 전까지 난은 아무나 즐길 수 없는 호사(豪奢)였다. 묵란은 교양인의 특별한 영역이었고 난초는 귀하고 비쌌다. 이런 '난초 선물'이 흔해진 것은 1990년대부터 정부가 농가의 난 재배를 장려하고 수입을 개방한 덕분이다.

▶김영삼 정권 첫 조각 때 전국 난초가 동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사 특수를 노리고 서울 난초상들이 무더기로 사들였기 때문이다. 마침 기업 인사 철이라 관공서와 기업 로비가 난초로 들어찼다. '군자의 선물'이라 그런가. 시끄럽게 입방아에 오르진 않았다. 난초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던지 10여년 전부터는 청와대가 직접 난초를 키워 선물했다. 보낼 곳, 안 보낼 곳을 분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 생일에 난초를 보내기도 했다.

▶'난초 선물'이 어제 종일 세간의 이야깃거리가 됐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생일 축하 난을 보냈다가 거절당한 일 때문이다. 더민주당은 거절당한 난을 기자들에게 사진거리로 내놓았다. 그러자 무슨 영문인지 오후 늦게 청와대가 다시 받아들였다. 전직 국회의장 빈소에도 조화를 보내지 않을 만큼 까다로운 대통령의 뜻을 알아서 받들었던 것일까. 정무수석이 독단으로 사양했다가 대통령 질책을 들었다는 게 청와대의 미심쩍은 설명이다. 무슨 배짱이 그리 두둑하기에 야당 대표의 선물을 세 번씩이나 사양했을까. 삼고초려(三顧草廬)에 빗대 '삼고초란'이라는 말이 나돈다.

▶법정 스님은 키우던 난초를 포기하는 일을 시작으로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했다. 암살당한 날 아버지가 아웅산 수지 여사에게 꽂아준 난초는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 됐다. 김종인 위원장의 난초는 어떤 이야기로 전해질까. '난향천리(蘭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라고 했다. 난초의 향기는 천리를 가고 인품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참 각박한 시대다. 난향(蘭香)이 흔해지는 만큼 인향(人香)은 귀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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