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서재응 上] '메이저 2선발' 서재응은 어떻게 서덕스가 됐나

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2016. 1. 29.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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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서재응(39)이 영욕의 17년의 프로생활을 끝으로 28일 은퇴를 선언했다. 서재응은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2006 WBC,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에서의 전성기와 KIA의 2009 한국시리즈 우승 등 한국야구사에 분명한 족적을 남긴 투수였다.

서재응의 은퇴를 아쉬워하며 두 편에 걸쳐 서재응의 프로생활을 정리해본다. 상편에서는 서재응의 아마추어 시절과 메이저리그 시절을 되돌아본다.

왼쪽부터 방콕아시안게임(1998), 뉴욕 메츠(2003), LA다저스(2006), 탬파베이 레이스(2007) 시절의 서재응. ⓒAFPBBNews = News1

▶해태 대신 인하대, 아시안게임 병역 혜택과 미국 진출

광주일고 시절, 최고의 유망주로 각광받던 서재응은 1996년 고졸 우선지명으로 해태 타이거즈(현재 KIA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지만 인하대 진학을 택했다. 1998 방콕 아시안게임에 나설 국가대표가 되며 금메달로 병역혜택을 받게 된다.

박찬호 이후 역대 6번째로 1997년 뉴욕 메츠와 계약금 135만달러에 사인한 서재응 입장에서는 이후 군문제는 신경쓰지도 않아도 되는 천금같은 아시안게임 대표 발탁이었다.

▶팔꿈치 수술의 후유증… 서재응도 5년 걸린 ML 데뷔

1997년 계약을 맺고 1998년부터 본격적인 미국 생활을 한 서재응은 화려했던 첫 풀타임 시즌(2003년)의 기억 때문에 곧바로 스타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서재응도 메이저리그에 올라가기까지 무려 5년간 고생을 하며 ‘눈물 젖은 빵’을 먹었다.

1998년 루키리그에서 2경기를 던진 후 곧바로 상위 싱글A까지 승격될 때는 금방 메이저리그에 올라올 줄 알았다. 그러나 아마시절 혹사로 인해 1999시즌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으며 사실상 시즌을 통째로 날렸고 수술의 후유증은 2000시즌까지 통째로 날렸다.

다행히 2001시즌부터 완벽히 돌아온 서재응은 상위 싱글A부터 시작해 트리플A까지 초고속 승격을 하며 메이저리그 가능성을 높였고, 결국 트리플A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2002시즌 7월 21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경기에서 8회 구원 등판해 1이닝 무실점 1탈삼진을 하며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는데 성공했다. 미국 진출 5년 만에 일군 메이저리그 데뷔였다.

▶환상적인 데뷔시즌… 하지만 그것이 ‘커리어하이’일줄 누구도 몰랐다

단 1이닝만 던진 2002시즌을 제외하면 사실상 서재응의 데뷔시즌은 2003년부터였다. 개막전 로스터에 진입하면서 선발투수 경쟁을 펼친 서재응은 데뷔 후 첫 선발경기(2003년 4월 6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전) 4.2이닝 3실점의 아쉬운 투구를 펼쳤다. 그러나 선발 3번째 경기였던 4월 17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원정에서 무려 7이닝 무실점의 엄청난 호투를 펼치며 메츠의 확실한 선발 자원으로 분류된다.

물론 지구 최하위를 기록했던 뉴욕 메츠지만 그래도 현재까지도 서재응은 톰 글래빈, 스티브 트랙슬 등이 버티던 선발진에서 2선발로 여겨졌을 정도(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 2003시즌 무려 188.1이닝을 던지며 9승 12패 평균자책점 3.82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기에 가능했던 대우였다.

특히 188.1이닝을 던지고도 고작 46개의 볼넷만을 허용한 것은 2003년 내셔널리그에서 규정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 49명 중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9이닝당 볼넷(2.20) 숫자 역시 11위에 해당할 정도로 칼날 제구력을 자랑했다. 선발투수로 기록한 fWAR(대체선수이상의 승수) 3.2는 당시 내셔널리그에서 공을 하나라도 던진 345명의 투수 중 19위에 해당할 정도로 뛰어났다.

풀타임 2년차를 앞둔 2004시즌 프로필 촬영때의 서재응. ⓒAFPBBNews = News1

이처럼 데뷔시즌부터 메이저리그에서도 상위급 성적을 낸 서재응에 대한 기대는 엄청났다. 고작 메이저리그에 갓 데뷔한 신인이 9승에 이정도로 뛰어난 제구를 자랑했으니 미래는 얼마나 대단할까 모두들 기대했다. 하지만 당시엔 몰랐다. 2003시즌이 서재응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빛난 최고의 시즌이었을 줄.

▶'서덕스'로 여겨졌던 2005시즌

기대 받았던 2년차 시즌에서 ‘소포모어 징크스’를 이기지 못한 서재응은 2004시즌 117.2이닝 5승 10패 평균자책점 4.90으로 무너졌다. 이에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한 2005시즌은 4월 막판 잠시 출전해 호투를 했음에도(3선발 2승 1패 평균자책점 2.00), 기회를 얻지 못하다 8월부터 시즌종료까지 놀라운 질주를 선보인다(11선발 6승1패 평균자책점 2.74).

당시 그의 활약의 워낙 뛰어났기에 현지에서는 언론과 팬들이 합심해서 ‘서재응을 활용하기 위해 메츠는 6선발 시스템을 도입하라’라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 국내에서는 컨트롤의 대명사였던 그렉 매덕스에 빗대 ‘서덕스’라고 불렀고, 실제로 서재응은 90이닝 이상은 던진 2005시즌 내셔널리그 투수 81명 중 평균자책점 4위(2.59), 9이닝당 볼넷 비율 3위(1.59)에 해당할 정도였다. 9이닝당 볼넷 비율 2위가 매덕스(1.44)였음을 감안하면 서덕스라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서재응은 2005시즌 다시 2003시즌 만큼의 위용을 되찾은 것을 바탕으로 2006 제1회 WBC에서 대표팀 1선발로서 맹활약하기도 했다(14이닝 1실점 2승 무패 ERA 0.64 WHIP 0.71).

▶두 번의 트레이드와 탬파베이 2선발에서 방출까지

선발 자원이 풍부했던 메츠는 2006시즌을 앞두고 서재응을 트레이드 자원으로 활용했고 이때 서재응은 LA다저스 2대2 트레이드로 이동하며 최희섭과 잠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다저스에서 부진하며(19경기 평균자책점 5.78) 트레이드 마감시한을 앞두고 또 다시 탬파베이 레이스로 트레이드 됐다.

2선발까지 분류됐지만 실패한 탬파베이 시절의 서재응. ⓒAFPBBNews = News1

서재응은 2007시즌을 앞둔 스프링캠프에서 4경기 동안 16이닝 평균자책점 1.69의 엄청난 호투를 선보이며 2선발까지 꿰찼다. 물론 당시의 탬파베이는 지금과 같은 저비용 고효율의 팀이라기보다 만년 꼴등 팀으로 메이저리그 최악의 구단으로 손꼽히던 팀이지만 어쨌든 메이저리그 공식 2선발로까지 인정받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스프링캠프에서의 호투는 온데간데없이 시즌 시작부터 부진했고, 결국 5월도 채 넘기지 못하고 11경기동안 평균자책점 8.13으로 무너지며 마이너리그로 강등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재응은 2007시즌 시작은 2선발이었지만 끝은 마이너리그 강등 후 방출이 결정되며 쓸쓸히 한국행을 선택했다.

'[아듀 서재응 下]'에서 계속

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jay12@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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