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한국정치 거목' 이만섭 前 국회의장
2009년 12월 7일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국회의장 이만섭 홀’로 명명된 연세대 연희관 401호를 방문해 현판을 가리키고 있다. 동아일보DB |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2년 가을, 울릉도 시찰을 위해 전함에 오른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앞에 서른 살의 장신 사내가 튀어나왔다. 박 의장의 시찰 소식을 듣고 몰래 승선해 기관실에 숨어 있다가 갑판으로 나온 것이다. 박 의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요즘 동아일보가 문제다. 쌀값이 오르면 1면 톱으로 쓰니 쌀값이 더 오르는 것 아니오”라고 따졌다. 사내도 지지 않았다. 그는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는 게 신문의 사명 아니냐”고 당당히 맞섰다.
14일 별세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1963년 대선 직후 치러진 6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에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8선(選) 의원, 국회의장 2회 역임 기록을 남긴 정치인으로서의 50년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고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총애 속에 화려하게 정치에 입문했지만 특유의 원칙과 소신으로 순탄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정치역정을 걸어야 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30대였던 1963∼67년 제6대 국회의원 재직 시절의 모습. 사진 출처 이만섭 회고록 |
7대 의원 시절인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서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이후락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김형욱 중정부장 등 박정희 정권 실세의 해임을 요구하다가 8년간 정치 활동의 공백기를 맞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과 결별한 계기였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1960년 4·19혁명 직후 4대 국회에서 자유당 부정선거 책임자들에 대한 구속동의안이 부결됐을 때의 일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시 본회의장 2층 기자석에 있던 기자 이만섭은 화가 나 “이 자유당 도둑놈들아!”라고 외쳤고 이는 의원이 아닌 인사로는 처음으로 국회 속기록에 이름이 오른 경우로 기록된다.
국회의장을 지내는 동안에는 ‘날치기는 절대 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고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에 빠지기도 했다.
2001년 IPU총회에서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오른쪽)과 악수하고 있는 이만섭 당시 국회의장. |
2000년 7월에는 교섭단체 구성 완화를 위한 국회법 개정안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 의해 운영위원회에서 날치기 처리됐지만 당시 고인은 본회의 직권상정을 거부했다. 당시 DJ가 전화해 “이 의장, 날치기를 안 하는 것도 좋으나 법대로 표결해서 다수결 원칙을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으나 “국회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며 원칙을 고수했다.
이후 2002년 2월 △국회의장의 당적 보유 금지 △안건 표결 시 반드시 의장석에서 선포 △국회의원의 자유투표제 등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해 헌정 사상 첫 무당적 의장이 됐고 현재까지도 이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고인은 자서전 ‘정치는 가슴으로’ 등을 통해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화합을 역설했다. 여당인 공화당 의원으로 시작해 1985년 국민당 총재에 취임하는 등 보수 정당을 이끌다가 1999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을 맡았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아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당의 산파 역할을 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평생 의회주의의 한길을 걸으신 한국정치의 거목을 잃었다. 누구보다 꼿꼿하고 올곧은 참정치를 펼쳤던 이 의장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한윤복 씨와 아들 승욱, 딸 승희 승인 씨 등 1남 2녀. 빈소는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8일 오전 9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02-2227-7550
홍수영 gaea@donga.com·조숭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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