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품에서 애들 빼내가는 사회가 문제"

정세연 2015. 12. 1.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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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이들과 함께한 세월이 18년, 초등돌봄교사 조범례씨

[오마이뉴스 정세연 기자]

<오마이뉴스>와 '대전시민아카데미'는 20~30년씩 한 자리에서 묵묵히 일해 온 이 땅의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연속 인터뷰한다. 땀 흘려 일해서 직장과 가정, 나아가 우리나라 경제를 지켜온 그들이 진정한 숨은 영웅들이다. <편집자말>

 초등학교 돌봄전담사로 일하는 조범례씨. 18년 전 우연한 인연을 시작으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초등학교 방과후 컴퓨터 강사로 시작해 지금은 돌봄전담사로, 18년째 학교에 머무르고 있는 조범례(42)씨는 나라가 나서서 아이들을 엄마 품에서 빼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돌봄교실은 그녀의 소중한 직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교실이 더 이상 확장돼서는 안 된다고 그녀는 이야기한다.

"돌봄선생님들끼리 모여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나라가 나서서 애들 망친다고. 엄마 품에서 아이들을 자꾸 빼내오면 안 되거든요. 엄마, 아빠를 일찍 집으로 돌려보내야죠. 돌봄교실이 보편화되는 방향으로 가면 결국 아이들이 망가지는 거예요."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비례해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무상보육서비스가 확대되고 돌봄교실이 보편화되면서 아이들이 집밖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과거에는 주로 저소득층 자녀들이 돌봄교실에 들어왔다면 지금은 맞벌이 가정의 자녀 등으로 많이 확대가 됐어요. 물론 맞벌이를 하면 아이를 케어하는 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죠. 하지만 어려운 와중에도 부모가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많이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녀 역시 너무나 잘 안다. 하나 있는 딸아이를 혼자 돌보다시피 하며 이제껏 버텨온 그녀다.

'파리 목숨' 방과후 돌봄 교사

 초등돌봄교사 조범례씨의 돌봄교실 모습
ⓒ 조범례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컴퓨터학원 강사로 일하다가 우연한 기회로 학교에 발을 들이게 됐다. 등산을 좋아했던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설악산에 올랐는데, 그 정상에서 대전의 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 그게 인연이 되어 1997년 초등학교 방과후 컴퓨터 특기적성 강사를 시작하게 됐다.

"그 땐 방과후교사가 학교장이랑 직접 계약하는 시스템이었어요. 낮에는 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학원에 나갔죠. 2년쯤 후에 결혼을 하면서 밤에 일해야 하는 학원은 정리를 하고 학교만 나가게 됐어요."

학교와 직접계약 형태로 일을 할 때는 수강료를 낮추더라도 강사 인건비는 챙겨갈 수 있었는데 중간에 위탁업체가 끼다 보니 인건비가 많이 낮아졌다. 한 달 200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600만 원의 수업료를 거둬들이는데 그녀가 받는 강사비는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고. 그런 불합리한 구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학교를 떠나게 됐다. 이후 공부방부터 텔레마케터, 로봇강사, 액세서리 노점 등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는 그녀다.

"남편 사업이 잘 안 돼서 경제적으로 정말 힘든 때였어요. 어린 애를 돌보면서 일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죠. 아이 때문에 밤늦게까지 일을 할 수는 없고, 그러다 보니 학교가 보이더라고요. 그 때 돌봄교실이 막 생길 즈음이었어요. 아이 데리고 아동지도사 수업을 들으러 다녔죠. 그렇게 자격증을 따고 2006년 3월에 처음 돌봄교사로 가게 됐어요."

하루 4시간, 주 20시간씩 근무를 하고 처음 받은 월급이 20만 원 가량. 당시 그녀의 집에서 학교까지는 한 시간 거리였는데, 버스에서 내리면 학교 근처의 마트에 들러 아이들 간식을 사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했다. 간식거리를 사들고 학교에 가면 집에서 챙겨온 프라이팬 등 조리기구로 직접 간식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먹였다. 다음 학기에 그녀는 집 근처의 학교로 옮겨 갔다. 하지만 한 학기 만에 계약이 종료되고 말았다.

"파리 목숨인 거죠. 옮겨간 학교에서는 언론재단 등 여기저기서 사업을 받아오기도 하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정작 학교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이후 그녀가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건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이 시작되는 대전의 S초등학교에서다.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이란 교육취약 아동·청소년의 교육적 성취 제고를 목표로 가정, 학교,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통합지원체제구축을 통해서 학습, 문화·체험, 심리·정서, 복지 등 아동·청소년 삶의 전 영역에서의 필요에 대응하고자 하는 사업이다. 2003년 중앙정부의 시범사업으로 시작했던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은 2006년부터 전국적 단위로 시행되었다.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 학교로 결정이 되면 교육복지사(사회복지사), 사서, 방과후교사 세 명이 꾸려졌으며, 하루 8시간 근무조건으로 채용되었다.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나.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던, 그녀가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다음날 합격 전화를 받았단다.

"너무나 절실했거든요. 당장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만 했으니까. 지금도 생각나요. 설 쇠러 서울 시댁에 올라가는 중에 전화를 받았어요. 그렇게 간절했던 일이니까 정말 죽자고 일했어요. 출근 첫 날 교장선생이 저를 데리고 유치원 교실로 가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봤지? 이렇게 하면 돼'라고. 그 때 유치원은 교실이 2개에 교사가 10명이었어요. 저는 혼자인데 유치원이랑 비슷하게 하면 된다고. 어쩌겠어요, 매일 새벽 2시까지 작업하고 노는 토요일에도 나가서 일하고 하면서 비슷하게 꾸려갔죠."

인정은 받았지만 너무 힘들고 지쳤노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그곳에서 일하던 중 방과후교실이 돌봄교실로 이름이 바뀌고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3년 정도 지났을까. 돌봄교실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히고 교육부에서 예산이 나오면서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학교는 돌봄교실 예산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의 근무시간을 줄였고 급여 역시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담당업무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무기계약에 교육감 직고용, "애정과 책임감 더 생겨"

방과후교사로 지내면서,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에 투입되면서, 엄마의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만나다 보니 사회복지에 관심이 생겼다는 그녀다. 일을 하며 사회복지 관련 공부를 병행했다. 기회가 된다면 지역아동센터에서 일을 하고 싶다 생각하던 중 이사 갈 집 근처 학교의 돌봄교사 채용공고가 떴다. 하나 있는 딸아이가 엄마가 학교에 함께 있기를 원했단다. 그렇게 그녀는 지금 근무지인 도안의 한 초등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사실 우리 딸이 제가 학교에 함께 있었으면 하는 이유가 있어요. 어린 딸을 돌봐줄 가족이 없었어요. 아이 외할머니가 봐주기로 하셨는데 혼자 사는 친정 오빠가 아파서 어머니가 그쪽으로 가셨거든요. 당장 일은 해야 하고 아이를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래서 아이를 제가 일하는 학교로 전학 시켜서 돌봄교실에 데리고 있을 때가 있었어요. 반 아이들에게도 선생님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티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제 아이를 데리고 있었어요."

모녀지간인 게 드러나지 않도록 딸아이에게 '절대 엄마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던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럼에도 딸은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어 좋아했다고. 그녀 역시 힘든 시간이었지만 아이를 한 공간에 두고서 일할 수 있는 게 큰 '복'이었다고 말한다.

"사직서를 내고서야 돌봄교실 아이들에게 밝혔어요. OOO가 내 딸이라고. 다들 깜짝 놀라더라고요. 제 교실에 있는 아이들 모두가 제 아이들인데, 딸이라고 더 봐주고 하지 않았죠. 오히려 더 엄하게 했어요. 그게 최선이었어요. 그렇게라도 일할 수 있었던 게 복이었고요."

힘들었기에 더욱 각별했던 그 시간들을 지나와서인가, 중학교 2학년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딸과 여전히 소통이 잘 된단다. 오랜 시간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온 그녀이기에 딸의 마음을 잘 읽어주는 것일 게다.

지금의 학교로 옮긴 지 어느덧 5년. 그녀는 매해 근로계약을 갱신해오다가 재작년부터 무기계약으로 바뀌어 '하루살이'는 면했다. 교무·행정업무보조, 방과후교사(돌봄교사) 등 학교회계직으로 불리던 인력들이 올해 대전을 포함한 일부 지역교육청에서는 '교육공무직'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또한 조례가 개정되면서 수습기간 6개월을 거친 돌봄교사는 무기계약이 가능하게 됐다. 학교장 채용으로 이뤄지던 돌봄교사 고용방식도 지난 1월 1일부터 교육감 직고용제로 바뀌었다.

"학교장이 채용하는 시스템 때문에 힘들었어요. 나를 뽑아준 교장이 다른 학교로 가고 없으면 다음 연도 채용은 불투명해지는 거예요. 또 돌봄교실은 학교에서 '미운 오리새끼' 같은 존재예요. 교장선생님 퇴근 시간 이후에도 문이 열려 있는 곳이 돌봄교실이거든요. 편히 쉬고 싶으실 텐데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어요. 사고라도 나면 학교의 장에게 최종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돌봄교실은 일찍 문닫고 싶은, 없애고 싶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죠."

매해 위태로운 하루살이 인생을 거듭해오다가 무기계약이 되기까지 쉬운 길은 아니었다. 학교는 돌봄교사의 근무시간 1~2시간 줄이는 것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번거로운 과정을 피하기 위해 신규 채용공고를 올렸다. 채용공고는 형식일 뿐 전년도에 이어 근무하는 거지만 신규채용이 되는 경우 연가일수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지금은 6개월 근무하면 무기계약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2년을 채워야 무기계약이 가능했어요. 매해 신규채용이 되다 보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되는 거죠. 학교에서는 그러더라고요. 명명백백하게 이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야 해서 신규채용 공고를 내는 거라고. 전임자가 충분히 잘 하고 있다면 내부평가를 통해서 연장 결정을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동안 그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던 학교는 노조의 공문(무기계약 회피의 건)을 통하자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채용된 그녀는 이제 매년 계약하지 않아도 되는 무기계약의 교육감 직고용 신분이 됐다. 과거 1년짜리 하루살이 삶을 살 때보다 더 안정감이 생긴 건 물론이고 학교에 대한 애정, 일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커졌다고 그녀는 말한다. 관리자 입장에서는 무기계약이 되면 긴장감도 떨어지고 일도 더 안 할 거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돈 얼마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우 받지 못하는 게 정말 화나는 일이에요. 제가 노조활동을 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고요. 돌봄교사들은 학교 안에서 근무하지만 교내 직원들과 교류할 여건이 안 돼요. 근무시간도 그렇고 여유시간도 없고요. 어울릴 수 없으니 소통도 안 되겠죠. 돌봄교사들이 가장 힘든 게 뭔지 아세요. 우리는 365일, 태풍이 와도, 메르스가 와도, 아마 지진이 나도 출근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전히 학교 안 외톨이 "우리를 동료로 봐줬으면"

 초등돌봄교사 조범례씨
ⓒ 조범례
돌봄 겸용교실과 전용교실이 운영되고 있는 그녀의 학교. 겸용교실은 저학년 학급 수업이 끝난 후 돌봄교실로 이용하는 곳이다. 겸용교실은 교사나 돌봄전담사, 봉사자 중 누구나 들어가서 관리가 가능하다. 현재 그녀가 일하는 학교의 돌봄 겸용교실은 교사가 담당을 하고 있다. 담당 교사가 일이 있어 빠지게 되면 다른 교사가 대신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맡고 있는 교실은 대신해 줄 누군가가 전혀 없다.

"제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거나 아파서 빠지게 될 경우 대신할 사람을 제가 알아서 채워놔야 하는 구조예요. 돌봄교실은 아무나 들어올 수도 없어요. 일단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이력서, 범죄 관련 조회 등 필요한 서류가 많거든요. 한두 시간 대신 봐 주는데 누가 그 서류를 다 준비해서 오고 싶겠어요. 학교와 교섭을 해서 대체인력풀을 만들어 놓기로 했는데 소용이 없네요. 그런 구조, 학교나 시스템에서 커버해주지 않고 돌봄교사에게 알아서 하라고 떠맡기는 구조 때문에 속상하죠. 교실을 대신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저는 절대 아파서도 안 돼요."

방학이 되면 사정은 더 열악하다. 맞벌이를 하는 학부모들은 돌봄교실 운영시간을 늘려 달라고 요청한다. 그녀의 출근시간은 오전 9시지만 8시부터 아이들이 온다고. 학교의 요구는 그녀의 마음에 더욱 상처를 낸다.

"학교에서는 저더러 일찍 나오라고, 봉사하라고 해요. 저희는 아직도 학교에서 교직원으로 인정을 못 받고 있어요. 그런 문화가 힘들어요. 우리를 동료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자기네 소속 아래 누군가가 아니라 동료직원으로, 서로 돕고 사는 파트너로 말이죠."

힘든 가운데서도 그녀를 학교로 돌아오게 만드는 에너지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커 가는 걸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그녀다. 20년 가까이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그녀가 내린 결론은 '아이들과 재미있게 잘 노는 게 가장 중요하다'이다. 그래서 그녀는 매년 목표를 세웠다. 올해는 아이들과 어떤 놀이를 하며 잘 놀아볼까 하고 게임을 연구한다. 가면을 쓰지 않고 의심 없이 자기를 보여주는 아이들이 그녀는 한없이 사랑스럽다.

"제가 부드러운 사람이 못 돼요. 그래서 처음엔 아이들이 무서워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원칙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칙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풀어주죠.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왜 아닌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해줘요. 한 학기 지나면 아이들이 원칙 내에서 자유분방하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녀가 원칙과 함께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식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에게 회의를 하도록 한다. 누군가는 그런단다. 어린 아이들 데리고 무슨 회의가 되냐고. 하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의 생각과 기대를 뛰어넘는다.

"돌봄교실에 오면 숙제가 있나 없나 확인하기 위해 알림장 검사를 먼저 해요. 근데 알림장을 잘 흘리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요. 1학년 아이들도 있으니까 한 학기는 교실에 가서 알림장을 가지고 오게 했어요. 2학기가 됐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회의를 하게 했어요. 알림장을 가지러 교실에 보내주는 게 맞을까, 안 보내주는 게 맞을까.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 아세요? 안 보내야한다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물었죠. 매일 잘 가져오다가 어쩌다 한 번 안 갖고 왔는데 억울하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아이들이 숙제를 못했더라도 아침에 학교에 가서 틈틈이 숙제할 시간이 있다는 거예요. 게다가 계속 알림장을 가지러 가게 하면 신경 안 쓰는 애들은 계속 신경 안 써서 안 가져온다고 그렇게 결론을 내린 거 있죠. 그래서 그 뒤로는 진짜로 안 보냈어요. 그러니 애들이 알림장을 잘 챙겨오더라고요. 그 때 아이들의 회의 결과를 들으며 소름이 쫙 돋았어요. 그런 보람으로 살아가는 거죠."

아이들과 잘 놀기 위해 오늘도 고민하는 그녀. 그녀를 포함한 수많은 돌봄교사들이 학교 안에서 교직원으로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소망한다.

방과후교사에서 방과후보육교사로, 이후 초등돌봄강사가 됐다가 이제는 초등돌봄전담사로, 지난 10년간 명칭이 자주도 바뀌었다. 그만큼 정책이 오락가락 했다는 이야기다. 변화하는 정책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우리 아이들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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