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피해자가 피해 다니는 '데이트 폭력'.. 처벌 솜방망이·가해자 격리 안돼 '2차 피해'

양민철 기자 2015. 12. 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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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인 간 폭력피해 8541명 "같은 학교 마주칠까 두려워".. 휴학·이사 등 불이익 감수

“니 X은 맞아야지 내 말을 들어. 말로는 안 통해.” 지난해 1월 A씨는 부산의 모텔 방에서 B씨(여)에게 욕설과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폭력은 성폭행으로 이어졌고 A씨는 강간·상해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이런 범죄에 법원이 내규로 정해 놓은 양형범위는 징역 2년6개월∼22년6개월. 그러나 그는 1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 선고돼 실형을 면했다. A씨는 범행 한 달 전까지 B씨와 교제하던 ‘전 남친(남자친구)’이었다.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등 ‘관계 내 폭력’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지만, 정작 그 ‘관계’가 참작돼 솜방망이 처벌로 그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사랑싸움’으로 치부되거나, 인정(人情)에 호소하는 가해자 측 요구로 합의가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직장 학교 등에서 가해자와 마주치기 두려운 피해자가 적을 옮기는 ‘2차 피해’도 빈번하다.

‘끔찍한 전 남친’… 왜 풀려났을까

A씨의 경우 B씨와 ‘합의’한 점이 감경 사유가 됐다. 재판부는 “피해자를 강간해 상해를 입히는 등 죄질이 좋지 않다”면서도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고 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미성년자도 아닌 성인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데 (그 부분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꼭 엄벌해야 할 반사회적 행위가 아닌 한 ‘감경 요소’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연인 간 폭력’에서 합의는 다른 범죄의 합의와 결이 다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C씨(여)는 올 초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해 치아가 부러졌다. 그러자 기소된 남자친구 가족들이 총출동했다. C씨에게 “다시는 안 그러게 하겠다. 한 번만 봐 달라”며 전화 공세를 퍼붓고, 집에까지 찾아와 “우리 아들과 얼마나 좋았느냐”고 호소했다. 결국 C씨는 재판부에 ‘처벌불원서’를 제출했다.

서울의 한 변호사는 “잘 모르는 타인을 상대로 한 범죄라면 집 주소는커녕 휴대전화번호도 알기 힘든데, 연인 사이니까 모르는 게 없지 않으냐. 공탁금을 걸거나 합의하면 법원에선 ‘서로 화해했나 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고인의 직업 등도 양형에 참작되는 요소 중 하나다. 이른바 ‘의전원(의학전문대학원) 폭행남’으로 알려진 박모(33)씨(국민일보 11월 30일자 11면 보도)에 대해 재판부는 “징역형 이상의 형을 선고하면 학교에서 제적될 위험이 있다”며 벌금형을 선고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범죄에 따르는 형벌의 정도는 적절해야 하지만 실제 국민의 법 감정과는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고 평가했다.

5m 접근금지?… 데이트 폭력 해법은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가해자로부터의 ‘2차 피해’다. 박씨에게 폭행당한 여자친구 이모(31)씨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서 “(박씨와) 같이 학교를 다녀야 하는 게 너무너무 싫고 무섭다. 내가 피해자인데도 마주칠까봐 가슴 졸이며 피해 다녀야 한다”고 했다.

이씨가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접근금지 결정은 ‘피해자의 주거지나 직장으로 가지 말라’는 게 일반적”이라며 “같은 학교라면 ‘피해자에게 5m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 정도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 관계자는 “이런 경우 데이트 폭력 피해자가 학교를 옮기거나 휴학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영국은 지난해 3월부터 애인의 폭력전과 등을 조회할 수 있는 ‘클레어법’을 시행하고 있다.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피해 여성 이름을 딴 법이다. 우리의 경우 데이트 폭력을 방지할 장치에 대한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연인 간 강력·폭력 사건 피해자는 모두 8541명이었다. 그중 108명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의해 목숨을 잃었거나 잃을 뻔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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