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동의 안받아도 '불이익' 허용한다고요?

입력 2015. 11. 30. 10:16 수정 2015. 11. 3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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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송곳>으로 보는 노동개편 쟁점 ④ 취업규칙 변경

노동문제를 다룬 웹툰 <송곳>에서 대형마트 ‘푸르미’ 일동지점 회사 쪽은 인력감축을 위해 수산과 황준철 주임을 징계해고하려 한다. 징계 당사자인 황 주임과 이수인 과장 등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는 도중, 구고신 부진노동상담소 소장은 “일단 취업규칙부터 좀 봅시다”라고 말한다. 취업규칙이 뭐냐고 묻는 이 과장에게 구 소장은 답답하다는 듯 말한다. “잉? 관리자가 취업규칙도 몰라요? 룰을 알아야 게임을 할 것 아뇨?”

‘취업규칙’은 사용자가 노동자의 효율적인 업무수행을 위해 노동조건 및 복무규율 등을 정해 둔 준칙이다. 사규·사칙·복무규정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취업규칙이 법적 용어다. 노동조합과 사용자가 협의해 작성하는 ‘단체협약’과 달리 취업규칙은 회사 쪽이 일방적으로 정한다. 단체협약과 취업규칙이 모두 있는 경우, 단체협약이 우선 적용된다. 단체협약과 배치되는 노동조건이 취업규칙에 있으면 이는 무효로 본다. 하지만 노조가 없어 단체협약이 없는 경우엔 취업규칙을 통해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노동조건을 정할 수 있다.

정부 “고용 다변화로 탄력성 필요”

예외적 변경 인정한 ‘통념상 합리성’
기준 불분명해 가이드라인 만들 것

노동계 “노동개악 밑돌 우려”

근로법상 노동자 과반동의 무력화
사쪽 ‘불이익 아니다’며 밀어붙일것

이에 근로기준법은 취업규칙에 관한 다양한 규제를 두고 있다. 사용자는 취업규칙을 작성해 고용노동부에 신고해야 하며, 근로감독관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노동부 장관한텐 취업규칙 변경명령권도 인정된다. 특히 근로기준법 제94조는 “사용자는 취업규칙의 작성 또는 변경에 관하여 해당 사업 또는 사업장에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노동조합,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다만,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에는 그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바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금지원칙’이다.

다만 대법원 판례는 취업규칙이 노동자 동의 없이 불리하게 변경된 경우에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는 경우엔 예외적으로 효력을 인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취업규칙의 변경으로 노동자들이 입게 되는 불이익과 다른 노동조건의 개선 상황, 사용자 쪽의 취업규칙 변경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바뀐 취업규칙에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는 경우엔 유효하다고 인정한다.

정부는 노동개편 일환으로 이 취업규칙 변경기준을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무엇이 ‘불이익 변경’에 해당하는지를 정한 행정지침(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회사가 취업규칙을 쉽게 바꿀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고용 형태가 다변화되고 있는 현실에 맞춰, 취업규칙도 탄력적으로 운용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 지침은 판례가 제시한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불이익 변경’ 여부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구체화하는 내용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5월 발표한 ‘취업규칙 변경의 합리적 기준과 절차’ 발제문에서, “취업규칙 변경에 있어 ‘불이익’과 ‘사회통념상 합리성’이라는 개념은 그 추상성으로 인해 법 적용과 해석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있다”며 “지침을 통해 (최근 논의되고 있는) 정년연장 및 임금체계 개편 등에 대한 개별적 구체적 판단 기준을 제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예를 들어 호봉제 폐지, 성과급 도입, 임금피크제 도입 등과 관련해 회사 쪽이 어느 부분까지 노동자 동의 없이 변경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정하겠다는 것이다.

노동계는 정부 지침이 ‘노동개악’의 밑돌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노광표 소장은 “성과형 연봉제, 임금피크제 등 정부가 추진하는 임금체제 개편이 일부 노동자에겐 ‘플러스’가 되는 측면이 있어, 불이익변경이 아니라고 판단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불이익으로 볼 것이냐에 대한 판단 권한을 행정지침을 통해 정부가 독점하게 되면, 취업규칙 변경과 관련해 노동자의 동의를 요구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조항을 사실상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권영국 변호사(장그래살리기운동본부 본부장)는 “이미 최근 들어 서울대병원 등 노동자에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을 밀어붙이는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다”며 “정부가 취업규칙 변경의 요건을 완화하겠다는 분명한 신호를 줬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은 지난달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전직원 투표를 실시했지만 과반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자, 임금피크제는 불이익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도입을 강행했다.

특히 취업규칙 변경기준 완화는 노동조합 가입률이 10.3%에 그치는 한국 현실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노동계는 예상하고 있다.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에선 취업규칙이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거의 유일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고려대 노동대학원 김성희 교수는 “노동조합이 조직돼 있더라도 단체협약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취업규칙 변경마저 쉽게 만들면 노동자들은 사용자들로부터 보호받을 근거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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