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봉 6000만원 포기한 알파걸 "가정 포기하는 생태계 싫었다"

김민정 2015. 11. 30.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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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여성차별

경력단절.

“누구나 부러워하는 유명 대기업 타이틀과 높은 보수를 포기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에 입사해 베어링 설계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김서연(27ㆍ가명)씨의 고백이다. 김씨는 2년 전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수능을 다시 치렀다. 초봉이 연 6,000만원이 넘는 직장에 취직해 주위의 부러움을 산 지 꼭 2년 만이다. 김씨는 “가정 아니면 일을 선택해야 되는 미래가 눈 앞에 그려져 고민 끝에 사표를 던졌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여풍 시대를 대표하는 ‘알파걸’ 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최상위권 성적을 놓친 적이 없고 높은 수능 성적으로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은 남자 동기들과 겨뤄 학점에서도, 체력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4학년 2학기 때 어렵지 않게 원하던 직장에 취업했다.

회사 업무는 고됐다.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10시 넘게 퇴근하는 강행군이었지만 대학 시절 전공을 살려 기계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일이 적성에 맞아 금세 인정도 받았다. 정작 김씨를 지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유리 천장’이 실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김씨는 “여성이 가정을 포기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회사 생태계는 그 자체로 유리천장이었다”고 돌아봤다. 사표를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타 부서 직원에 대한 사내 뒷담화였다. 김씨는 “육아휴직을 8개월 쓴 직원에 대해 ‘눈치가 없다’, ‘민폐다’라는 식의 험담이 사내에 돌기 시작했다”며 “이곳에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김씨는 운이 좋은 편이다. 실력을 갖췄을 뿐 아니라 가족과 남자친구의 지지로 어려움 없이 진로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진출했다가 ‘출산과 육아’라는 벽에 부딪쳐 경력이 아예 단절된 여성은 지난해 4월 기준으로 197만 7,000명에 달한다. 15~54세 기혼여성의 20%가 넘는 수치다.

이런 실정에도 불구하고 ‘일 가정 양립’을 어렵게 하는 기업의 문화는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성비를 조정해 뽑아야 할 정도로 여성 지원자들의 스펙이 뛰어나지만 일선 부서에서는 남자 신입직원을 많이 데려가기 위한 경쟁이 벌어진다”며 “출산, 육아휴직 등으로 결원이 생기는 것을 꺼리는 부서 입장에선 당연할 일”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은 출산ㆍ육아 휴직으로 인한 결원을 신규인력으로 보충하는 일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전상길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출산과 육아로 인한 단절에 대해, ‘쉰다’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2세대를 양성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공유돼야 한다”며 “육아휴직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회사에 대해 인센티브를 주는 등 정부의 의지도 뒷받침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정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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