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하고 싶으면 '노오오오력' 해라?

차현아 기자 2015. 11. 29.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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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에 의존한 노동집약적 방송 제작 환경…월급은 10년째 그대로, 최저임금도 못 따라가

[미디어오늘 차현아 기자]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지탱하는 모든 시스템은 사적 관계에 근거한다. 시스템이 사라진 자리엔 좋은 메인작가언니와 친절한 PD라는 인적 존재가 자리잡는다.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권리 보장을 위해선 목소리 높인 항의만이 유효하다. 끈질긴 설득과 읍소 등이 뒤따른다. 이 또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좋은 메인작가와 성격 좋은 PD님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3년차 교양프로그램의 한 서브작가는 “원래 방송작가에게는 식비가 제공되지 않는다. 막내만이라도 식비를 주자는 의견도 들어주지 않았다. 예전에 한 팀장님은 사내 식당 식권을 가져다주시면서 먹으라고 배려해준 적이 있다. 이런 여건들 또한 사람에 따라 다르고 팀장이 바뀌면 보장되지 못하는 일들”이라고 털어놨다.  

시스템이 아예 없지는 않다. 일부 방송사에선 방송작가를 비롯한 제작 인력에 대해 프로그램 불방 시 급여지급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해놓기도 했다. 기자가 만났던 방송작가는 한 지상파 방송사의 내부 문건을 보여줬다. 이 문서는 프로그램이 불방됐을 경우 제작인력에게 일정 부분의 급여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공지한 공문서였다. 다만 이러한 지침이 얼마나 방송제작팀에 강제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해당 방송작가는 “이미 일 그만두고 난 다음에야 다른 방송작가 친구를 통해 이런 문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공문서가 있더라도 안 지키면 그만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송작가들의 처우문제를 대변할 기구도 마땅치 않은 현실이다. 방송작가 노동조합 같은 것은 어느 방송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각 방송사별로 구성작가협의회는 있지만 대부분 구인구직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한국방송작가협회라는 단체도 있다. 이 곳은 방송작가들의 권익보호와 처우개선, 저작권 관리와 회원 재교육 등을 맡는다. 다만 진입장벽이 높다. 시사교양 및 다큐 분야의 방송작가 중 4년 이상 집필 활동을 하면서 메인작가로 활동을 해야 입회 자격이 주어진다. 예능작가 역시 5년 이상 집필활동 기록이 있어야 한다. 특히 처우 개선이 절실한 막내작가나 서브작가를 위한 공간은 되지 못하는 셈이다. 

한 종합편성채널의 시사교양프로그램에서 일하는 막내작가는 “우리 입장을 대변해 줄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 없다. 노조도 없고 방송작가협회는 메인 이상 작가들의 입장과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방송 콘텐츠는 절대적으로 제작하는 ‘사람’의 기여도에 따라 좌우된다. ‘열정착취’가 방송계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만큼 사람의 노력과 열정이 투여한 만큼 방송 제작이 이뤄지는 환경의 특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는 전무하다. 방송작가들은 제작 설비의 일부로 취급되는 까닭이다. 필요에 따라 인적 요소인 열정을 강요하면서도 그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는 ‘제작 설비’이므로 굳이 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구조화된 관행에 가깝다. 일부 방송작가들조차 이러한 부분이 업계의 관행이라며 받아들이기도 한다. 한 예능 프로그램의 작가는 “예능 프로그램의 특성 상 조기종영 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 2회나 1회 앞두고 통보를 받는다. 급여를 늦게 받는 일도 한 회분 정도 급여를 덜 받는 일도 있었다. 그 경우에는 언니들(선배작가)도 그렇게 받아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또다른 한 방송작가는 “진실을 보겠다며 방송을 만들면서도 정작 우리는 우리의 진실은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막내작가의 월급이 10년 넘게 그대로인 상황에 대해 선배 방송작가들을 비롯해 우리는 방송작가의 진실을 외면해온 것 아닐까”면서 “이런 생태계에 있으면서도 왜 넘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방송작가들에 대한 실태조사나 정책 마련 노력은 이제야 첫 걸음을 떼는 중이다. 최근 미래부는 한국전파진흥협회와 ‘방송산업 활성화를 위한 프리랜서 방송인력 실태조사 연구’에 나섰다. 방송사 내의 비정규직과 프리랜서의 고용형태를 조사하고 방송 산업 정책 수립에 밑거름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또한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방송작가의 노동인권 실태조사를 통해 이들의 고용 환경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방송작가를 지탱하는 시스템의 부재는 방송작가 개인을 넘어 방송 산업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이종관 미디어미래연구소 정책연구실장은 독립제작사가 23일 주관한 ‘상생의 외주제작 생태계 조성을 위한 세미나’에서 “방송 제작 환경에선 원래 하고 싶었던 일아니냐며 제작 인력들에게 ‘노오오오력’만 강조해온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의 방송콘텐츠 산업은 인적 역량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양질의 인력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돼 시장에 공급되지 않는다면 방송 산업 인프라 자체가 취약해진다”고 의견을 밝혔다. 

한 방송작가 A씨(35)는 “방송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방송작가들의 고용 불안정은 제일 큰 문제다. 안정적으로 이 프로그램에 애정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래서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다가도 쉽게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경우도 많다. 팀도 프로그램도 자주 바뀌니 업무 전문성이나 자료 축적도 어렵다. 결국 방송 프로그램의 질을 담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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