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어색한 '오 마이 비너스'

입력 2015. 11. 29. 09:5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토요판] 안인용의 ‘좋아요’가 싫어요

“저는 조금 뚱뚱한 편인데요. 그런 저에게 먼저 다가와준 친구가 있어요. 살이 찌는 이유는 외롭거나 괴롭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라고, 그러니까 너는 외롭거나 괴롭거나 아니면 둘 다인 거라고. 너에게 하고 싶은 한마디야. 고마워, 내 옆에 있어줘서!”

지난 11일 첫 방송을 시작한 한국방송 월화드라마 <오 마이 비너스>(이하 <비너스>)의 한 장면이다. 120㎏ 몸무게 때문에 ‘슈퍼 뚱땡이’로 불리는 오수진(유인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이지훈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구의 비너스’로 불리는 대단한 미모를 가진 친구 강주은(신민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뚱뚱한 자신의 친구가 되어주어서 고맙다는 나름대로 감동적인 얘기를 전하려 한다는 건 알겠는데 잘 들어보면 내용이 이상하다. 살이 찐 사람을 우울증 환자 취급하다니, 이건 고마워하기는커녕 화를 내야 할 이야기 아닌가. 이런 얘기에는 화를 낼 줄도 모르던 오수진은 이지훈이 강주은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모습에는 불같이 화를 내고, 결국 둘의 우정은 산산조각난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변호사가 된 둘은 같은 로펌에서 다시 만난다.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달라졌다. 오수진은 70㎏을 감량해 ‘미녀’가 됐고, 강주은은 30㎏이 쪄 ‘뚱땡이’가 됐다.

<비너스>는 몸무게 77㎏의 변호사인 강주은과 헬스 트레이너인 김영호(소지섭)의 ‘헬스 로맨스’를 내세운 드라마다. 여자 주인공이 왕년에는 잘나갔지만 지금은 미모를 잃어버린, ‘역변’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비너스>는 최근 종영한 문화방송 <그녀는 예뻤다>(이하 <그녀>)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그녀>에서 황정음이 폭탄 머리에 가까운 곱슬머리와 안면홍조증에 주근깨투성이인 김혜진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분장을 마다하지 않은 것처럼, <비너스>에서 신민아는 강주은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특수분장을 하고 살이 찐 모습으로 등장한다.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이 아닌 친구에게 가면서 드라마가 시작된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녀>는 김혜진이 자신을 예뻤던 그 시절의 김혜진으로 기억하는 첫사랑 지성준(박서준)의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친구인 민하리(고준희)를 내보내면서 시작되고, <비너스>는 15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 임우식(정겨운)이 자신을 버리고 친구 오수진과 사랑에 빠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드라마의 초기 설정은 분명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와 <비너스>는 전혀 다른 드라마다. 가장 큰 차이는 역변한 여자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살이 찌는 건 외로워서도
괴로워서도 아니다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하며
동정할 필요도 없다
그저 각자의 삶이고
그 삶들을 존중하면 된다

지금의 티브이가 해야 할
시청자가 듣고 싶은 얘기는
이게 아닐까

<그녀>에서 주인공 김혜진은 비록 사춘기를 지나며 왕년의 미모는 잃었지만 지금의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 한마디씩 거드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도 않는다. 지금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지성준 앞에서는 순간 작아졌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김혜진은 외모와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 반면 <비너스>의 주인공 강주은은 대단히 자신만만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처럼 비치지만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한다. 외모에 대한 주변인들의 지적질과 오지랖에 발끈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자존감이 땅에 떨어진 강주은은 남자친구가 떠난 이유가 ‘내가 뚱뚱하기 때문’이라며 문제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서 찾으려 한다.

시선의 차이는 드라마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녀>에서는 모든 갈등 상황이 김혜진이 예뻐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시청자 역시 김혜진이 예뻐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 모습 그대로 성장하길 응원했다. 오히려 중간에 스트레이트파마와 메이크업으로 갑자기 예뻐져 이에 실망한 시청자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다. <비너스>는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내적 갈등과 표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신을 선택한다. 아니, 변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갈등의 원인이자 불행의 씨앗을 여자 주인공의 외모, 정확히는 불어난 몸무게 30㎏으로 특정하고 그로 인한 문제에 ‘현실’이라는 이름표를 붙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강주은에게 변신은 의무다. 갑상선기능저하 등 강주은의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설정은 살을 빼는 게 단지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변명에 가깝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드라마지만, 강주은이 어떻게든 예전의 외모를 되찾는 건 예견된 미래다.

<비너스>가 흘러가는 흐름은 꽤 익숙하다. 지난 9월 폐지된 스토리온의 메이크오버 프로그램 <렛미인>에서 많이 봤던 바로 그 이야기의 흐름이다.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장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변신의 서사 말이다. 결혼 전에 날씬한 몸매와 미모를 가졌지만 아이를 낳은 뒤에 급격하게 살이 찌기 시작한 사연 신청자. 살이 찌자 남편의 폭언과 외도가 시작됐고 시집 식구들을 비롯한 가족들마저 사연 신청자를 비난한다. 안타까운 사연 신청자를 <렛미인>이 구원한다. 닥터 군단의 도움과 합숙을 통해 몸매와 미모를 되찾고, 변신의 그날 모든 가족들은 달라진 사연 신청자를 안아주며 눈물 콧물을 흘린다. <비너스>는 실제 극 중에서도 메이크오버 프로그램 <스텔라 쇼>를 등장시킨다. 주인공 강주은은 날씬하게 변신해 <스텔라 쇼>에 출연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녀>와 <비너스>의 또 다른 차이는 여자 주인공과 그 주변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녀>에서는 절친인 김혜진과 민하리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 둘은 서로를 오해하거나 적으로 내몰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이기에 서로를 이해하게 한다. <비너스>의 강주은과 오수진은 절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때 친구였던 사이였음에도 남자 앞에서 너무 쉽게 서로를 적으로 만든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이 만든 잣대를 서로에게 들이밀며 ‘한때는 날씬했지만 지금은 뚱뚱한 여자 대 한때는 뚱뚱했지만 지금은 날씬한 여자’의 구도를 만들어 답이 없는 싸움을 하게 한다. 오수진이라는 인물을 그리는 방식은 특히 문제가 더 심각하다. 오수진은 자기 일이 있고 직업이 있음에도 뚱뚱했던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친구의 남자나 빼앗으며 유치한 복수를 일삼는다. 다시 살이 찔까봐 밥 한 끼를 마음 편하게 먹지 못하는 오수진의 모습은 얼핏 악녀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뚱뚱한 여자를 동정하고 안쓰러워하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비너스>의 세계는 날씬하게 태어나 영원히 날씬하게 살아가는, ‘선천성 미녀’만 행복할 수 있는 세계임이 틀림없다.

지난 25일 문화방송 <황금어장: 라디오스타>에는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나르샤와 배우 박준면, 황미영과 개그우먼 홍윤화가 출연했다. 나르샤를 제외하고는 사이즈가 큰 ‘빅 걸’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특집 제목처럼 치명적인 매력을 선보였다. 어릴 때부터 뚱뚱했기 때문에 튼 살 없이 ‘예쁘게’ 살이 쪘다며 좋아하고, 큰 사이즈의 옷 정보를 교환하고, 유연성을 뽐내며 신나게 춤을 췄다. “제가 (저를) 잘 키운 것 같다”는 홍윤화와 “다이어트를 해서 날씬한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굳이 저까지 거기 합류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박준면은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외로움이나 괴로움 같은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라디오스타>에 레전드로 남을 만한 개인기를 선보인 개그우먼 홍윤화는 <비너스>에서 신민아가 연기하는 강주은의 비서 역으로 출연하고 있다. 77㎏의 몸무게 때문에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울상인 가상의 인물 옆에 태어날 때부터 뚱뚱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고 있는 현실의 인물 홍윤화가 있다.

<렛미인>이 폐지되고, 드라마 <그녀>가 호응 속에 막을 내리고, 홍윤화가 <라디오스타>레전드를 찍은 2015년의 풍경에 <비너스>는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살이 찌는 건 외로워서도, 괴로워서도 아니다.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하며 비웃을 필요도 없고 동정할 필요도 없다. 그저 각자의 삶이고, 그 다양한 삶들을 존중하면 된다. 지금의 티브이가 해야 할, 그리고 시청자가 듣고 싶은 얘기는 이게 아닐까.

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한겨레 인기기사>
[카드뉴스] 박 대통령 국외 순방 때마다 무슨 일이…
애국군인이 되어라, 치료비는 니가 내고
김무성 아버지 김용주의 발언이 가장 길고 고약했더라
[화보]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박 대통령 불참
[화보] 80년대 여배우들의 과거와 현재

공식 SNS [페이스북][트위터] | [인기화보][인기만화][핫이슈]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