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본드'를 언젠간 보고 싶지만

2015. 11. 2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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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김도훈의 불편(불평)한 영화
007 시리즈

나는 제임스 본드 영화의 오랜 팬이다. 하루는 도대체 내가 왜 이 시리즈를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하는지를 곰곰이 앉아서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영원히 쟁취할 수 없을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남성다움’에 대한 약간의 뒤틀린 매혹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결론 말이다.

그렇다. 사실 제임스 본드는 비정한 난봉꾼이다. 그에게 여자는 마티니, 혹은 새로 뽑은 애스턴 마틴 스포츠카와 비슷한 존재다.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잘 알겠지만, 본드와 섹스를 한 본드걸은 죽는다는 기묘한 법칙도 존재한다. 처녀가 아닌 여자 캐릭터는 살인마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다는 1980년대 미국 슬래셔 장르영화의 법칙과 딱히 다를 바가 없다.

본드를 만들고 본드를 연기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니얼 크레이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제임스 본드가 여성 혐오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남자들이 본드가 여자를 대하는 방식에 경탄한다”고 묻자 이같이 말하며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위험한 남자인데다, 그녀의 곁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제임스 본드는 한국 연애서들이 말하는 바로 그 괴상한 ‘나쁜 남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나는 여기서 매우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굴고 싶지만, 어딘가 위험하고 음험하고 음침한 인간에게 매혹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완전히 거부할 수도 없다. 인간이란 성적인 파트너를 구할 때 가장 정치적으로 덜 공정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무작정 부인할 수도 없다.

다만 본드가 계속 이런 존재로 머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007 두번 산다>에서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 본드걸이 등을 밀어주는 걸 마음껏 즐기던 숀 코너리의 제임스 본드를 지금 다시 스크린에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가장 정치적으로 공정할 수 있는 본드? 그건 어쩌면 게이 본드일 거다. 웃기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전세계적인 동성결혼의 원년이라고 부를 법한 올해는 본드 캐릭터를 게이로 만드는 건 어떠냐는 제의들이 정말로 쏟아지기도 했다.

당연히 전직 본드들의 반응은 시원치가 않다. 피어스 브로스넌은 “제임스 본드가 게이 캐릭터가 되어도 전혀 상관없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과연 어떤 식으로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전설적인 본드 시리즈 제작자인) 바버라 브로콜리가 살아 있는 동안 게이 본드를 허락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1973년부터 85년까지 모두 7번 본드를 연기한 로저 무어는 “그런 건 본드가 아니다. 이언 플레밍이 쓴 캐릭터가 더이상 아닐 테니까”라고 말하며 “본드를 계속해서 이성애자 백인 남자로 견지하는 것이 호모포비아적이거나 인종차별적인 것은 아니고 그저 캐릭터의 근원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든 새로운 본드를 매우 적극적으로 거부해왔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6대 제임스 본드가 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를 다들 기억하시는가? 아마 당신은 완벽하게 그 시절을 잊고 있겠지만, 당시 시리즈의 극성팬들은 정말이지 완강하게 대니얼 크레이그를 거부했다. 그들은 제작사로 협박 전화를 했고, 인터넷에 반대 사이트를 만들었고, 공식적인 반대 성명을 내놓았다. 그들은 제임스 본드가 금발이라는 사실도 싫어했다. 지나치게 근육질이라는 사실도 거부했다. 사람들은 대니얼 크레이그가 오히려 러시아에서 온 악당 역에 어울릴 법한 배우라고 악담을 늘어놓았는데, 뭐 일리가 없는 소리는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악당 역에 끝내주게 어울릴 법한 배우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007 카지노 로얄>의 한 장면에서 무릎을 쳤다. 제작진은 오히려 대니얼 크레이그의 본드답지 않은 외모를 한 장면에서 끝내주게 활용했다. 스포츠카를 몰고 카지노에 도착한 한 부자는 대니얼 크레이그를 보자마자 자동차 키를 던져준다. 왜냐면, 하얀 옷을 입은 대니얼 크레이그는 영국 신사와 스파이의 결합이라기보다는 확실히 동구권 어디에서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들고 테러리스트로 일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서구로 이민와서 자동차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남자처럼 보였으니까.

나는 고전적인 난봉꾼 제임스 본드를 여전히 사랑한다. 어떤 존재는 그저 오랜 판타지의 존재로 남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만,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고 말하려다가 갑자기 흠칫하며 ‘아니, 코스모폴리탄.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고 말하는 본드 역시 언젠가는 보고 싶다. 물론 그걸 시리즈 자체에 대한 패러디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려면 거의 서커스에 가까운 기교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김도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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