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서의 스윙맨]ML선구자라 쓰고, 최동원이라 읽는다
박병호, 이대호, 김현수, 황재균, 손아섭… 올시즌 스토브리그에서 메이저리그 도전을 직간접적으로 표명한 선수들이다. 여기에 기존에 뛰고 있던 추신수, 류현진, 강정호까지 포함한다면 내년 꿈의 무대에서 활약할 한국인 선수는 최대 7명에 달한다. 역대 최다 인원이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한국 야구선수들에게 있어 메이저리그란 달보다도 먼 곳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곳을 꿈꾸며 문을 두드렸던 선구자는 누구였을까? 이름하여 한국인, 메이저리그 도전기.
이후 최동원은 명실상부한 국가대표 에이스 반열에 오른다. 2년 후 열린 제26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콜롬비아전에 선발 등판한 그는 삼진 16개를 잡으며 세계 야구계를 놀라게 한다. 결정타는 이듬 해 8월 캐나다에서 열린 슈퍼월드컵야구대회였다. 홈팀인 캐나다전-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첫 장면으로 쓰이기도 했던 그 경기다-에서 최동원은 1피안타 완봉승을 거둔다. 이전 경기인 호주전에서도 1피안타 완봉승 피칭을 펼친 그는 대회 우수 투수상에 선정되기도 한다.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최동원은 이렇게 말했다.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 구단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아직 한국프로야구 출범도 안 했던 시절에 생긴 일대 사건이다.
문제는 또 있었다. 계약금 규모다. 당시 토론토로부터 제시 받은 금액은 4년간 총 61만 달러(당시 한화로 약 4억 3000만원)였고 최동원도 여기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뒤늦게 이것이 메이저리그 입단 선수가 받는 최소한의 대우라는 사실을 알고 계약무효선언 소동까지 벌였다. 이 밖에도 군복무를 아직 이행하지 않은 점, 당시 소속팀이던 롯데와의 계약 문제 등 해결해야 될 문제가 산적했다. 최동원의 아버지인 최윤식씨는 “군복무와 현소속팀인 롯데와의 문제 등이 있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적인 배려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호소했다.
★박철순-미국행 티켓은 끊었지만...
최동원보다 유리한 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철순은 연세대 재학시절, 1학년을 마치자마자 육군 체육팀인 성무에 입단해 일찌감치 병역의 의무를 해결했다. 대한야구협회 역시 이듬 해 1월 호주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박철순을 제외하는 등 적극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순류에 힙입어 빅리그행은 급물살을 탔다. 1980년 1월 29일 대한체육회 강당에서 박철순의 밀워키 입단식이 열렸다. 같은 해 3월 6일, 마침내 박철순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곧바로 밀워키 산하 마이너 구단에서 박철순은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한다. 그는 “같이 훈련 받은 30명의 투수 중 종합 평점에서 4위에 올랐고, 테스트 합격이 거의 확실시 된다”고 말했다.
2년차에 들어서며 출장 기회가 많아졌다. 1981년엔 싱글A와 더블A를 오가며 25경기 모두 선발로 등판했고 8승 10패 평균자책점 4.77을 기록했다. 빅리그 입성도 머지 않은 듯 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그 해 9월 6일 휴가차 귀국한 박철순이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자 복귀를 포기하고 OB 베어스(현 두산)와 총 4400만원에 계약한 것이다. 당연히 원 소속 구단인 밀워키는 발끈했다. 밀워키는 “계약 위반이라며 벌금으로 7만 달러(당시 환전 시세로 약 5000만원)을 내라”고 통보했다. 계약서 상으로도 계약금 2만 달러를 받고 1983 시즌까지 밀워키 산하 마이너구단에서 뛰기로 했기 때문에 반박할 말도 없었다. 박철순은 “벌금이 얼마인지도 몰랐다. 액수를 알고 보니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프로라는 개념조차 없던 당시의 한국야구가 빚은 촌극이다.
★선동열, 박동희-러브콜은 왔지만...
토론토는 박동희의 미국 진출 의사를 타진하며 50만~1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역시나 걸림돌은 군복무였다. 이듬 해 방위 근무가 예정된 박동희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하더라도 2년 후에나 미국 진출이 가능했다. 결국 연고구단인 롯데행과 빅리그 진출을 놓고 고민에 빠진 박동희는 1990년, 당시 프로야구 최고 몸값인 총 1억 5200만원에 롯데와 계약을 체결한다.
오퍼를 보낸 팀은 LA 다저스다. 1982년 청소년 야구대회와 이듬 해 세계 선수권대회를 통해 그를꾸준히 지켜본 다저스는 구애를 펼쳤다. 그러나 선동열은 “미국에 갈 뜻은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 해외진출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나서야 성공할 수 있었다. 1995년 시즌이 끝난 후, 해외 진출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그에게 미국과 일본의 스카우트들이 몰려들었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와 시애틀 매리너스가, 일본에서는 주니치 드래곤즈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영입 작전에 나섰다. 만일 이때, 미국으로 선회했다면 나고야의 태양이 아닌, 캘리포니아의 태양이 되지 않았을까?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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