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서의 스윙맨]ML선구자라 쓰고, 최동원이라 읽는다

이상서 입력 2015. 11. 28. 07:02 수정 2015. 11. 2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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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 이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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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우리 가슴에 심어준 꿈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달나라 여행을 설계하게 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달을 두고 노래한 시인들이 더 중요하고 큰 일을 했다고 믿습니다.” 우주과학자인 칼 세이건이 자신의 책 <코스모스(사이언스북스, 홍승수 옮김)>를 통해 한 말이다. 달에 발자국을 처음 디딘 이는 암스트롱이지만, 그 이전에 꿈의 지평을 넓힌 예술가들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다.

박병호, 이대호, 김현수, 황재균, 손아섭… 올시즌 스토브리그에서 메이저리그 도전을 직간접적으로 표명한 선수들이다. 여기에 기존에 뛰고 있던 추신수, 류현진, 강정호까지 포함한다면 내년 꿈의 무대에서 활약할 한국인 선수는 최대 7명에 달한다. 역대 최다 인원이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한국 야구선수들에게 있어 메이저리그란 달보다도 먼 곳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곳을 꿈꾸며 문을 두드렸던 선구자는 누구였을까? 이름하여 한국인, 메이저리그 도전기.

★최동원-한국야구의 존재를 알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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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란 하늘 위에 군림하는 존재를 땅으로 끌어내린 선수가 있다. 바로 최동원이다. 1978년 7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 1차전. 미국의 타자들은 프로 리그도 없는 나라에서 온 무명의 투수에게 혼쭐이 났다. 이날 선발로 등판한 최동원은 5회까지 단 한 개의 안타만을 내주며 미국 타선을 꽁꽁 묶었다. 6회초가 돼서야 한국 내야진의 실책을 묶어 처음 점수를 냈을 정도로 자존심을 구겼다. 최동원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날이었다.

이후 최동원은 명실상부한 국가대표 에이스 반열에 오른다. 2년 후 열린 제26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콜롬비아전에 선발 등판한 그는 삼진 16개를 잡으며 세계 야구계를 놀라게 한다. 결정타는 이듬 해 8월 캐나다에서 열린 슈퍼월드컵야구대회였다. 홈팀인 캐나다전-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첫 장면으로 쓰이기도 했던 그 경기다-에서 최동원은 1피안타 완봉승을 거둔다. 이전 경기인 호주전에서도 1피안타 완봉승 피칭을 펼친 그는 대회 우수 투수상에 선정되기도 한다.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최동원은 이렇게 말했다.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 구단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아직 한국프로야구 출범도 안 했던 시절에 생긴 일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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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조건만 좋으면 진출하고 싶다”던 최동원의 바람은 곳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먼저 토론토와 대한야구협회 간의 이견차가 이유였다. 1982년 당시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 야구선수권대회에 최동원이 출전하기로 했는데 토론토 측은 이를 두고 “최동원은 아마추어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다”고 경고를 내렸던 것이다. 최동원이 토론토의 예비선수 명단에 끼여 있기 때문에 계약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게 근거였다. 결국 국제야구연맹(AINBA)까지 올라간 이 사안은 “최동원은 아마추어 자격이 있고, 야구선수권대회 역시 문제가 없다”고 결론이 났다.

문제는 또 있었다. 계약금 규모다. 당시 토론토로부터 제시 받은 금액은 4년간 총 61만 달러(당시 한화로 약 4억 3000만원)였고 최동원도 여기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뒤늦게 이것이 메이저리그 입단 선수가 받는 최소한의 대우라는 사실을 알고 계약무효선언 소동까지 벌였다. 이 밖에도 군복무를 아직 이행하지 않은 점, 당시 소속팀이던 롯데와의 계약 문제 등 해결해야 될 문제가 산적했다. 최동원의 아버지인 최윤식씨는 “군복무와 현소속팀인 롯데와의 문제 등이 있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적인 배려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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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83년 1월 최동원은 미국 진출을 포기하고 롯데와의 입단 계약에 들어갔다. 169명의 그해 프로 선수 중 유일하게 입단 계약을 맺지 않은 최동원은 장장 4개월간 줄다리기를 벌였다. 계약금 4500만원과 연봉 3000만원 등 총 1억원에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된다. 장명부(삼미)와 함께 프로야구 최고 몸값이란 훈장은 메이저리그 문턱에서 주저앉은 쓰라림을 달래 줬다.

★박철순-미국행 티켓은 끊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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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과 동시대의 라이벌인 박철순은 그보다 한발짝 더 꿈의 무대에 다가섰다. 1979년 한미 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최동원과 원투 펀치를 형성한 그는 일찌감치 빅리그 스카우트의 눈도장을 받았다. 대회가 끝난 10월 22일 이덕준 재미대한야구협회 지부장의 도움을 받아 밀워키 브루어스와 협상에 들어간 박철순은 도장을 찍는 데 성공한다. 조건은 계약금 1만 달러(당시 한화로 500만원)에 월봉 700달러(한화 약 35만원). 만족스러운 금액은 아니지만, 비교적 안정적으로 미국 진출을 성사시킨 것이다. 박철순 역시 “꼭 미국 프로 무대에서 활약할 기회를 갖고 싶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최동원보다 유리한 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철순은 연세대 재학시절, 1학년을 마치자마자 육군 체육팀인 성무에 입단해 일찌감치 병역의 의무를 해결했다. 대한야구협회 역시 이듬 해 1월 호주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박철순을 제외하는 등 적극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순류에 힙입어 빅리그행은 급물살을 탔다. 1980년 1월 29일 대한체육회 강당에서 박철순의 밀워키 입단식이 열렸다. 같은 해 3월 6일, 마침내 박철순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곧바로 밀워키 산하 마이너 구단에서 박철순은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한다. 그는 “같이 훈련 받은 30명의 투수 중 종합 평점에서 4위에 올랐고, 테스트 합격이 거의 확실시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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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메이저리그의 마운드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해 5월 박철순은 어깨 부상을 당하며 경기는커녕 연습에도 제대로 참가하지 못한다. 회복엔 석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박철순을 스카우트 했던 밀워키 구단의 산하 마이너리그의 총책임자 레이 포이테빈트는 8월 “박철순이 부상에서 완쾌했고, 제 컨디션을 완전히 되찾았다”며 “지금 상황만 유지한다면 빅리그 승격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박철순의 데뷔 시즌 성적은 이렇다. 싱글A리그에서 11경기에 출전했고 이중에서 6경기를 선발로 등판했다. 최종성적은 3승 2패 평균자책점 2.31. 승수가 적긴 했지만 당시 팀투수진들 중 평균자책점 3위로 안정감을 자랑했다.

2년차에 들어서며 출장 기회가 많아졌다. 1981년엔 싱글A와 더블A를 오가며 25경기 모두 선발로 등판했고 8승 10패 평균자책점 4.77을 기록했다. 빅리그 입성도 머지 않은 듯 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그 해 9월 6일 휴가차 귀국한 박철순이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자 복귀를 포기하고 OB 베어스(현 두산)와 총 4400만원에 계약한 것이다. 당연히 원 소속 구단인 밀워키는 발끈했다. 밀워키는 “계약 위반이라며 벌금으로 7만 달러(당시 환전 시세로 약 5000만원)을 내라”고 통보했다. 계약서 상으로도 계약금 2만 달러를 받고 1983 시즌까지 밀워키 산하 마이너구단에서 뛰기로 했기 때문에 반박할 말도 없었다. 박철순은 “벌금이 얼마인지도 몰랐다. 액수를 알고 보니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프로라는 개념조차 없던 당시의 한국야구가 빚은 촌극이다.

★선동열, 박동희-러브콜은 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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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콜은 왔으나, 덤덤히 거절한 선수도 있었다. 1987년 한국야구는 최동원 이후 등장한 강송구 투수에 흥분했다. 최고 151km에 달하는 광속구를 뿌리며 타자들을 연이어 돌려 세운 이 투수의 이름은 박동희. 1987년 열린 한미 대학야구대회에서 이름을 알린 그는 같은 해 대만국제야구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2회전에서 만난 미국전에 선발로 나온 박동희는 탈삼진 15개를 기록하며 3피안타 완봉승을 거둔 것이다. 이 투구로 박동희는 메이저 스카우트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운명의 장난일까. 그에게 손을 내민 팀은 6년 전 최동원과 교섭을 가진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다.

토론토는 박동희의 미국 진출 의사를 타진하며 50만~1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역시나 걸림돌은 군복무였다. 이듬 해 방위 근무가 예정된 박동희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하더라도 2년 후에나 미국 진출이 가능했다. 결국 연고구단인 롯데행과 빅리그 진출을 놓고 고민에 빠진 박동희는 1990년, 당시 프로야구 최고 몸값인 총 1억 5200만원에 롯데와 계약을 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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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투수인 선동열 역시 일찌감치 메이저리그로부터 구애를 받은 바 있다. 선동열이 국제무대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198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대회였다. 여기서 한국팀은 곧 선동열이고, 선동열은 한국팀 자체였다. 특히 미국과의 최종전에서 선발로 나온 선동열은 삼진 11개를 뺏는 등 완벽한 승리를 따낸다. 한국이 치른 6경기 중 4경기에 등판한 그의 성적을 살펴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미국, 중국, 일본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대회 최다승 투수에 올랐고, 107명의 타자를 상대하며 탈삼진 30개를 빼앗은 반면, 안타는 17개 밖에 내주지 않았다. 허용한 실점은 단 한 점이고, 대회 평균자책점은 0.31이었다. 이 정도면 빅리그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오퍼를 보낸 팀은 LA 다저스다. 1982년 청소년 야구대회와 이듬 해 세계 선수권대회를 통해 그를꾸준히 지켜본 다저스는 구애를 펼쳤다. 그러나 선동열은 “미국에 갈 뜻은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 해외진출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나서야 성공할 수 있었다. 1995년 시즌이 끝난 후, 해외 진출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그에게 미국과 일본의 스카우트들이 몰려들었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와 시애틀 매리너스가, 일본에서는 주니치 드래곤즈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영입 작전에 나섰다. 만일 이때, 미국으로 선회했다면 나고야의 태양이 아닌, 캘리포니아의 태양이 되지 않았을까?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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