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Weekly BIZ] 혁신은 오케스트라의 화음 같은 것

유한빛 기자 2015. 11. 2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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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3대 경영대학원 스페인 이에세 경영대학원 패디 밀러 교수 CEO는 혁신 설계자.. 직원들은 연주자..중간 관리자와 10~20명씩 팀워크 이루는 '혁신 생태계' 구축하라
스페인 이에세 경영대학원 패디 밀러 교수

"대기업은 모두 혁신에 서투릅니다. 최고경영자(CEO)가 아닌 부장과 과장, 일반 직원들이 주도적으로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혁신 생태계(innovation ecosystem)'를 갖추면, 효율적이고 지속적으로 혁신이 일어날 겁니다."

패디 밀러(Miller·61) 교수는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LBS), 프랑스 인시아드(INSEAD)와 함께 유럽의 3대 경영대학원으로 꼽히는 스페인 이에세(IESE) 경영대학원에서 조직관리와 기업혁신에 대해 강의하는 인물이다. 이탈리아 명품 업체 불가리,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와 가정용품 전문 기업 헹켈, 영국 보험사 스탠다드생명 등 유럽 업체들에 기업 혁신에 대해 조언했다. LG그룹과 현대캐피탈에서 혁신에 대해 강연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회색으로 물든 머리칼과 콧수염,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과 넉넉한 풍채가 돋보이는 노신사였다. 그러나 푸근한 표정과 달리 화법은 직설적이었다. "최고경영자가 직접 기업을 혁신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사내 위계질서와 규격화된 경영 체계가 최고경영진의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상명하달식으로 조직 전체를 혁신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제안한 대안은 '혁신 설계자(innovation architects)'로서의 CEO와 혁신 생태계다.

직원 수가 10만, 20만명에 달하는 대기업은 사내 위계질서가 강하다. 삼성, 현대차, LG그룹 같은 대기업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이런 조직 구조는 엄격한 보고체계를 만들고 부서 간, 직급 간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실무진에서 낸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상층부까지 전달되지 않고, 최고경영진이 외치는 혁신은 일선 직원들의 업무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외로 진출할 정도로 성장하면 경영 체계는 한층 더 정형화된다. 혁신은 더더욱 일어나기 어려워진다. 혁신에 실패한 대표적인 대기업으로 코닥을 언급했다.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하고도, 필름 사업부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업화를 포기한 탓에 기업이 기울었다.

그렇다면 대기업의 혁신은 영영 불가능한 이야기일까. 대안은 있다. 밀러 교수는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은 중간관리자와 실무 직원들이 혁신을 이루도록 유도하는 혁신 설계자"라며 "CEO가 일선 직원들이 능동적으로 일할 환경을 만들어주면 혁신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부서장이나 팀장 같은 중간관리자가 부하직원 10~20명 정도와 함께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개발하는 구조가 이상적입니다. 오너 경영인이 아닌 CEO는 몇 년 뒤에 회사를 떠날 겁니다. 10년, 20년 걸리는 연구·개발(R&D)이나 투자, 당장 돈을 벌 수 없는 사소한 혁신에는 관심이 없어요. 반면 팀장과 부장급은 회사의 장기적인 미래를 고민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CEO보다 일할 날이 더 많이 남았을 테고, 실제로 조직을 꾸려가는 책임자이기 때문에 실무적인 아이디어와 문제점을 더 잘 압니다."

특별한 권한도 직급도 없는 일반 직원들은 어떻게 기업 혁신에 기여할 수 있을까. "일상적인 업무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사업 기회가 많습니다. 회사 전체를 단번에 뒤바꿀 정도로 큰 기획이 아니더라도요. 예컨대 A라는 방법 대신 B라는 방법을 쓰면 업무를 처리하는 시간이 단축되지 않을까, 이런 제품을 판매 라인에 추가하면 어떨까, 이런 기계를 도입하면 어떨까 같은 실무적인 아이디어들을 말합니다. 회계, 홍보, 영업, 생산을 맡은 각 부서 단위에서 크고 작은 혁신이 일어나고, 그 결과물이 쌓이면 어떨까요. 기업 전체에 혁신이 일어나는 겁니다."

밀러 교수는 대기업에서 혁신하는 방법으로 '5+1 쐐기돌(keystone) 행동'이라는 방법론을 제안했다.

①집중(Focus)

"스위스의 생명과학기업 론자는 유럽, 미국, 아시아에서 생산 시설을 28곳 운영하면서, 직원들이 업무 개선 방법이나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마음대로 제출하게 했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까요? 8300명에 달하는 직원들이 낸 아이디어가 '그저 쌓이기만' 했습니다. 회사엔 별다른 도움도 되지 못했죠. 화학공학 분야의 연구원이던 펠릭스 프레비돌리는 당장 필요한 아이디어에 집중하는 체계를 도입했고, 론자의 경쟁력을 높였습니다. 예를 들어 티아민 제품을 보완해야 할 때는 티아민과 관련된 제안만 뽑아내는 식으로 아이디어를 정해진 목표에 집중시키는 겁니다."

②연결(Connect)

"직원 한 사람이 혼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민하기보다, 여럿이 머리를 맞댈 수 있게 유도해야 합니다. 고객, 회사 동료, 전혀 상관없는 분야의 인물들, 이렇게 세 가지 영역에서 직원들이 혁신을 찾도록 하면 됩니다. 업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나 통찰은 때때로 조직 밖에서 얻을 수 있어요."

③수정(Tweak)

"한 번에 통과될 만큼 완벽한 기획은 없습니다. 처음에 내놓은 구상은 항상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최초의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수정하고 보완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가전제품 업체 다이슨의 창립자 제임스 다이슨은 첫 진공청소기를 출시하기까지 시제품을 5000개나 만들었습니다. 자그마치 15년이나 걸렸죠. 혁신은 어느 날 갑자기 맨땅에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④선택(Select)

"모든 아이디어는 기본적으로 나쁜 아이디어입니다. 최상의 기획만 골라내고 나머지는 버려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게 걸러내는 문지기(gatekeeper)가 필요한데, 적절한 평가 기준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검토할 수 있는 다양한 창구를 마련해야 합니다."

⑤잠행(Stealthstorm)

"은밀하게 준비하는 능력도 중요합니다. 기업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는 누구인지, 투자 자금과 인력 등 중요한 자원이 어디에 배분돼 있는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면 어떤 그룹을 공략할지 등 정치적인 문제를 파악해야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생겼을 때 실행으로 옮기기 쉽습니다. 다국적 제약사 화이자의 생산성 향상 시스템을 예로 들어 볼까요. 인사 총괄 조던 코헨은 사내 고급 인력들이 인터넷 검색, 통계자료 수집, 발표 자료 제작 같은 자질구레한 업무에 시간을 많이 뺏긴다는 점을 발견하고, 사소한 업무는 외주업체에 맡기는 화이자웍스(PfizerWorks)라는 시스템을 고안했습니다. 코헨은 시스템을 개발하는 단계에선 회사의 지원 없이 시험판을 만들고, 동료들에게 테스트를 부탁해 부족한 점을 보완했습니다. 이런 사전 작업 덕에 코헨의 아이디어는 단번에 경영진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최고경영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력이나 자금 등 기업의 자원이 적절하게 배분됐는지, 사내 정치 관계는 어떤지 같은 정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속하기(Persist)'

"무엇보다도 혁신을 이뤄내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꾸준함, 즉 지속성입니다. 세계 최대 기업 인맥 관리 서비스 업체인 링크트인을 설립한 리드 호프먼 회장은 이 사업 계획을 20년 가까이 구상했어요. 결제업체 페이팔에서 일하고 있을 때도 기획안을 포기하지 않고 틈틈이 세부 계획을 세운 결과, 2002년 링크트인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가입자 수가 1억명을 넘어설 정도로 성공한 서비스 업체죠. 개인이 아닌, 기업 단위의 꾸준함도 혁신적인 성과를 냅니다. 독일 제약사 머크는 20년 뒤에 성과가 나타날 만한 장기 연구·개발 사업에도 투자해 새로운 약을 개발해냅니다."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려면

밀러 교수는 혁신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생태계를 구축하려면 경영자가 두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첫 번째는 '혁신 지도자(innovation leader)'는 '혁신자(innovator)'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CEO의 역할은 직원들이 혁신자가 되도록 이끄는 겁니다. 두 번째는 '브레인스톰의 섬'에 갇히지 말라는 겁니다. 이삼일 동안 전 직원이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면 혁신이 될까요? 아닙니다. 혁신은 일회성 행사가 아닌 1년 내내, 일상 업무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이해한 경영자라면 엄청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려고 고민하기보다, 혁신적인 업무 환경을 조성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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