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드라마 속 여성들 '역변'하는 현실

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입력 2015. 11. 27.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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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변’이라는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외모가 망가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인터넷 유행어다.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의 오픈사전에서는 이 단어에 대한 정의에서 “주로 여자 연예인”에게 쓰인다고 설명한 점이 흥미롭다. 올해 이러한 ‘역변’은 특히 여성 연예인들이 연기하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게서 많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얼마 전까지 배우 황정음이 맡았던 드라마 캐릭터가 ‘역변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MBC 인기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의 김혜진이라는 인물 얘기다. 혜진은 소녀 시절, 예쁘고 공부까지 잘하는 ‘첫사랑의 아이콘’이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미모가 빛을 바래며 ‘역변’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예뻤다>가 종영된 요즘에는 KBS 월화드라마 <오 마이 비너스>에서 배우 신민아가 연기하는 주인공 강주은이 새로운 ‘역변의 아이콘’으로 뜨고 있다. 주은은 학창 시절 ‘대구의 비너스’로 칭송받은 지역 대표 꽃미녀였으나 서울대 법대와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인생 목표에 매진하는 동안 차곡차곡 체지방이 쌓여 현재는 과체중에 시달리는 ‘거구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혜진과 주은의 ‘역변’은 단지 외모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그녀들을 둘러싼 환경 역시도 점점 안 좋아진다. 말하자면 그들의 ‘역변’은 마치 과거의 전성기에 비해 갈수록 악화되는 그들 환경에 대한 은유처럼 그려진다.

혜진은 부친의 출판사가 망하면서 이른 나이에 밑바닥 생업전선에 뛰어들었고 그로 인해 정식 취업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드라마는 혜진의 현재를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학자금 대출금과 안쓰럽기 짝이 없는 스펙의 취업장수생이란 초라한 신분뿐”이라고 설명한다. 주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노력 끝에 일생일대의 꿈을 이뤘음에도 사람들이 먼저 보는 것은 그녀의 변호사 명패가 아니라 육중한 몸이다. 15년 동안 청춘을 함께했던 첫사랑마저 프러포즈를 기다리던 결정적 순간에 그녀를 떠난다. 이제 주은에게 남은 건 ‘차인 노처녀’라는 딱지와 늘어난 체지방과 갑상샘기능저하증이라는 질환뿐이다.

‘역변’의 의미를 이처럼 환경으로 확대해보면 다른 드라마 속 여성 인물들에게서도 같은 특징이 다수 발견된다. 가령 MBC <맨도롱 또 >의 이정주(강소라)는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평생 모은 돈을 사기당하며 삼십대를 목전에 두고 인생 최악의 상황에 처한다. SBS <이혼변호사는 연애 중>의 고척희(조여정)는 잘나가던 변호사직을 박탈당하고 사무장으로 겨우 재취업하며, tvN <오 나의 귀신님>의 주방보조 나봉선(박보영)은 늘 구박만 당하다 주방을 뛰쳐나오고 심지어 귀신까지 빙의된다. tvN 장수 시리즈 <막돼먹은 영애씨>의 영애(김현숙)도 빼놓을 수 없다. 영애의 조건은 시리즈를 지내오는 동안 꾸준히 나빠졌다. 경력이 쌓이며 승진한 것도 잠시, 삼십대 중반 이후에는 이직으로 조건이 더 열악해지고 서른여덟 살이 된 14시즌 초반부에서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가 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출발했다.

드라마에서 여주인공들에게 자주 발견되는 ‘역변’ 상황은 갈수록 사회적 조건이 악화되는 여성 현실이 자연스레 반영된 결과처럼 보인다. 남자 주인공들의 조건은 변함없이 재벌이거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정변’ 코스를 밟는 것과 비교해보면 더 분명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로맨스 안에서 대부분 갑을관계로 표현되는 남녀 주인공의 환경은 근래 들어 점점 격차가 벌어지거나 역전되고 있다. <그녀는 예뻤다>에서 어린 시절 혜진의 보호를 받던 지성준(박서준)은 훗날 그녀의 상사인 부편집장으로 귀환하고, <이혼변호사는 연애 중>에서 과거 척희의 사무장이던 소정우(연우진)는 변호사가 되어 그녀의 상사로 온다.

얼마 전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2015년 세계 성차별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남녀 성평등지수가 세계 115위 최하위권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 격차는 과거에 비해 오히려 더욱 늘었다. 근래 드라마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여성들의 ‘역변’ 그리고 남주인공과의 갈수록 커지는 신분 격차는 이러한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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